일제강점기 축구는 국민들의 설움을 달래 준 선물이었다. 1935년 일본축구협회가 개최한 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조선 축구단은 일본 클럽을 연달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억압 속에 거둔 이 쾌거는 일본 내 교포사회는 물론 국내의 조선인들에게도 큰 자부심이 됐다. 광복 70년을 맞은 지금도 우리에게 한일전은 여전히 축구 국가대항전 이상의 의미다. 해방 이후 77전 40승 23무 14패란 압도적인 성적이 말해주듯, 한국은 일본을 마주하기만 하면 어느 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5일 밤 중국 우한에서 열린 ‘2015 동아시안컵’ 일본과의 2차전에서 한국은 무더위 속 혈투 끝에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비록 승리하진 못했으나 한일전 사상 첫 3연패의 위기에서 낸 의미 있는 결과였다. 지난 70년 사이 벌어진 일본과의 라이벌전 명승부를 꼽아봤다.
● 목숨 걸고 현해탄을 건넌 영웅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4년 3월. 한국은 스위스월드컵 본선행의 마지막 관문인 일본전을 앞두고 생각지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홈 앤드 어웨이로 펼쳐지는 최종예선을 앞두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일본의 방한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 가서 지면 나라망신”이라며 한국 대표팀의 원정 경기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극전사의 정신력은 대단했다. 당시 사령탑인 이유형 감독은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고 서약서까지 써가며 이 전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다. 두 경기를 모두 원정지에서 치르게 된 대표팀은 3월 7일 일본 메이지신궁 경기장에서 열린 1차전에서 5-1완승을 거뒀다. 일주일 뒤인 14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2차전은 2-2 무승부를 거두면서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의 꿈을 이뤘다.
● “그건 축구가 아닌 전쟁이었지”
스위스월드컵 이후 30여 년간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던 한국은 1985년, 이듬해 열릴 멕시코월드컵 최종 예선에 올랐다. 상대는 공교롭게도 숙적 일본. 10월 26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1차전에서 2-1 승리를 거둔 한국은 11월 3일 운명의 2차전을 펼쳤다. 잠실 주경기장엔 8만 관중이 들어찼고 온 국민의 눈은 TV에 쏠렸다. 승부는 후반 16분 갈렸다. 페널티 지역 오른쪽에서 찬 최순호의 슈팅이 골 포스트를 맞고 튀어 나오자 허정무가 빠르게 오른발 슛으로 연결, 결승골을 터뜨렸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한국 선수들은 모두가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당시 활약했던 최순호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경기장이 아니라 전쟁터였다. 월드컵 본선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컸던 만큼 승리의 감격도 상당했다”고 기억했다.
● 도하의 기적과 도하의 비극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펼쳐진 1994년 미국월드컵 최종예선은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한국은 북한과, 일본은 이라크와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를 펼치는 상황. 한국은 북한에 2점차 이상을 거두고 일본이 이라크에 패하거나 비겨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북한을 3-0으로 이겨놓고도 웃을 수 없었다. 종료 시점까지 일본이 이라크에 2-1로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도하의 경기장에 이라크의 오만 자파르가 경기종료 직전 동점골을 터뜨리며 일본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 꿈을 무너뜨렸다. 한국에는 ‘도하의 기적’으로 일본에는 ‘도하의 비극’으로 기록된 일대의 사건이었다. 당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김호 전 감독은 “선수들 모두 그라운드에 누워 대성통곡을 했었다”며“내 축구 인생에서도 가장 감격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도쿄 대첩’. 1997년 9월 28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3차전은 한일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승부로 꼽힌다. 양팀 모두 조 1위에 주어지는 본선 직행 티켓을 위해 꼭 승리해야 하는 일전이었다. 팽팽한 접전으로 흘러간 경기에서 승부의 추는 일본 쪽으로 기울었다. 후반 20분 야마구치 모토히로가 골키퍼 김병지의 키를 넘기는 로빙 슛으로 승기를 잡았다. 일본의 승리가 굳어지는 듯했던 후반 38분 ‘기적의 드라마’가 시작됐다. 최용수의 헤딩 패스를 받은 서정원의 헤딩골로 동점을 만든 한국은 3분 뒤 이민성의 그림 같은 중거리 슛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이 경기를 중계한 MBC는 56.9%의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고, 캐스터 송재익은 재치 있는 입담으로 한일전의 또 다른 스타가 됐다.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 박지성의 사이타마 산책, 그리고…
2010년 5월 24일 일본 사이타마2002 스타디움. 당시 대표팀 주장이었던 박지성이 일본 수비 4~5명의 압박을 단독 드리블로 뚫어내고 넣은 골에 일본 관중석은 침묵에 휩싸였다. 박지성은 그 침묵 속 관중석을 응시하며 조깅하듯 달리는 ‘사이타마 산책’ 세리머니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결과는 2-0. 한일전 통산 40번째 승리였다.
하지만 이날 이후 한국은 한 번도 일본을 꺾지 못했다. 최근 5년간 3무 2패의 열세. 5경기 연속 무승은 광복 70년 역사상 처음이다.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한국만 만나면 졌던 일본은 1972년 한일 정기전을 제안해 자국 축구의 발전 기회로 삼았다. 시들해진 한일정기전 부활 논의가 다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그래서 나온다. 김호 전 감독은 “한일전 승리에서 느끼는 통쾌함도 좋지만 라이벌전 부활을 통해 한국 축구의 질적 발전을 이끌 수 있다면 한일전을 부활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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