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명사 총정리 '중세' 대백과 총 4부작 중 1권 번역 출간
"근대의 뿌리이자 빛의 시대, 마녀사냥 등 일부만 부각시켜 오해"
움베르토 에코(83)가 기획하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수백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중세 대백과의 제 1권이 번역 출간됐다. 이탈리아에서 2010~2011년 총 4권으로 나온 이 시리즈를 한국에 소개하는 시공사는 11월에 제2권, 내년에 3권과 4권을 마저 출간할 예정이다. 각각 분량 1,000쪽이 넘는 대작이고 연구자라면 늘 곁에 두고 들춰봐야 할 학술서다.
기획자 이름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 시리즈는 유럽문명사를 연대순, 주제별로 총정리하는 멀티미디어 백과사전 엔시클로메디아(www.encyclomedia.it)의 일부다. 기원부터 현재까지 유럽 문명사의 모든 것을 종이책ㆍ전자책ㆍ웹ㆍ앱 등 다양한 매체에 담아 온축하려는 이 장대한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한 사람도 에코다. 중세편 완간에 이어 고대(전3권), 근대(전5권)편의 일부가 나왔고, 현대 편은 기획 중이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에코는 역사, 철학, 미학, 기호학 등 여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석학이다. 중세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지적인 투쟁을 그린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작가이고, 중세를 대표하는 사상가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엔시클로메디아 중세편을 맡은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전체 4권 중 제 1권이 다루는 시기는 중세의 시작부터 초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안정기에 접어드는 새 천 년까지다. 구체적으로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1000년까지로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2권(1000~1200년)은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3권(1200~1400년)은 ‘성, 상인, 시인의 시대’, 4권(1400~1500년)은 ‘탐험, 무역, 유토피아의 시대’다. 각권은 경제와 사회, 철학, 과학과 기술, 의학,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 등 전 분야를 망라해 중세를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에코가 쓴 전체 서문에 잘 요약돼 있다. 중세를 근대와 단절된 암흑기로 보는 ‘오해’를 바로잡는 게 핵심이다. 근대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됐고 이로써 종교 중심의 중세가 끝나고 이성의 시대가 열렸다는 널리 퍼진 통념과 달리, 근대의 뿌리는 중세임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중세를 단절이 아닌 연속, 어둠이 아닌 빛의 시대로 평가한 것이다.
중세는 유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비잔티움, 이슬람, 동방 문명과 얽혀 있다는 것, 중세인은 우울하고 비참하기만 했던 게 아니라 삶의 기쁨과 쾌락도 찬양했다는 것, 고대 과학이나 고전문화를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 마을 단위로 고립된 세계가 아니라 순례를 통한 여행의 시대였다는 것, 엄숙주의ㆍ마녀사냥ㆍ여성 혐오 등 중세의 얼굴로 흔히 꼽히는 것들이 중세의 일부만 부각시켰거나 부당한 오해라는 사실 등도 지적한다.
중세사 전공 학자로 1, 2권을 감수한 차용구 중앙대 교수는 ‘다문화적이고 통섭적인 접근’이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중세를 유럽이 혼자 만든 시대가 아니라 이슬람, 비잔틴문명 등 외부 문명과의 교류 맥락에서, 다시 말해 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서술하는 접근법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한다.
중세의 재발견은 19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해 서구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본격화했다. 서구가 전 지구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기점을 근대로 보고 서구의 근대를 발전 모델 삼아 따라잡으려고 애써온 비서구의 경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근대의 이름으로 우월성을 주장하던 서구 중심주의를 반성하는 계기가 그렇게 출발했다. 중세와 ‘단절’된 근대의 ‘탄생’을 강조하던 기존 시각이 흔들리자 비로소 중세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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