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직후 시아버지는 단식자결, 친정 오빠는 일가 친척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다. 언니도 독립투쟁을 선택한 시댁 일가와 긴 여정을 떠난다. 남편은 독립청원운동을 준비하던 중 숨지고, 두 아들도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 옥고를 치른다. 본인 역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고문으로 두 눈을 잃었다. 한 여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가족사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의성 김씨 양반집에서 태어나 퇴계 후손 진성 이씨 집안으로 시집 간 김락은 그렇게 한 명문가의 여인에서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가 된다. 경북 안동은 기초자치단체로는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포상 받은 인사만 353명으로 서울에 버금간다. 한 인물의 공적을 캐다 보면 독립운동의 큰 인물과 유적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나온다.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여행으로는 안동만한 곳도 드물다.
●온 마을이 독립운동에 나선 내앞마을과 김대락
옆머리를 밭게 쳐올리고 긴 앞머리는 기름을 발라 올렸다. 몇 가닥은 살짝 내려 이마를 가리고, 더러는 머리 끝만 고슬고슬하게 말아 멋을 냈다. 1929년 안동청년동맹 제2회 정기대회에 모인 젊은이들의 헤어스타일은 요즘 기준으로도 파격적이다. 더구나 이곳은 유교적 질서가 완고하기로 소문난 경북 안동이다. 임하면 내앞마을(천전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2007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개관해 지난 해 ‘경상북도’로 범위를 넓혔다)에 걸린 대형 사진은 ‘안동은 고리타분한 양반동네’라는 인식을 간단하게 뒤집는다.
내앞마을에 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잡은 건 우연이 아니다. 이곳은 안동지역 애국계몽운동의 요람인 협동학교가 1907년 문을 연 곳이다. 자신의 집을 교사(校舍)로 내준 김대락은 경술국치 이후 일가와 마을주민 150명을 이끌고 만주 서간도로 망명한다. 마을의 절반이 만주로 이주한 셈이다. ‘삼천석댁’(사람·글·살림이 각 1천 석)으로 불릴 정도로 경제력과 학문을 두루 갖춘 집안이었지만 타민족의 지배하에 살수 없다는 대의에 모든 것을 버렸다. 67세의 노구로 만삭의 손부와 손녀까지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던 그는 ‘백하일기’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만 살아서 요란한, 생전 처음 맛보는 만주의 추위’라고 회고했다. 일행이 마을을 떠난 것은 1910년 음력 섣달이었다. 독립군 양성에 앞장서 만주벌 호랑이로 이름을 떨친 김동삼 역시 이 마을 출신이고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린 내앞 사람만 20여명에 이른다. 김대락은 김락의 오빠다.
[주변 관광지]
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전문 학예사로부터 안동과 경북뿐 아니라 구한말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기념관 뒤편엔 협동학교가 시작된 가산서당이 있다. 안동 동부지역 7개 면이 힘을 합쳐 설립했다 해서 협동(協東)학교다. 학교를 이끌던 주요 인물들이 만주로 망명한 후 없어졌던 건물을 2007년 복원했다.
마을 안쪽엔 김대락의 집 ‘백하구려’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만주로 망명 후 백두산 언저리에 산다는 뜻으로 백하(白下)라는 별호를 사용했다. 백하의 옛 오두막이라는 뜻의 백하구려(白下舊廬) 현판은 그가 순국한 뒤 금상기가 썼다. 협동학교 교사이자 만주에서 군사학교인 백서농장을 조직하고 서로군정서에서 참모장으로 활약한 일송 김동삼의 생가도 있다. 초가가 기와로 바뀌었지만 일부 구조는 그대로라고 전한다.
내앞마을은 500년 가까운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마을 왼편 산자락의 의성김씨 종택은 퇴계 학맥을 잇는 학봉 김성일이 지었다. 학봉이 북경에 갔을 때 주택 설계도를 가져와 참고했기에 구조나 배치가 독특하다. 사랑채와 이어지는 부속채는 서고와 헛간으로 구분된 2층으로 흔치 않은 구조다. 민속마을은 아니지만 고택이 많아 발걸음이 평온하다.
마을 앞으로는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이 흐른다. ?강변의 백운정 유원지는 잔잔한 호수에 드리운 솔숲이 일품이다.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영덕으로 이어지는 34번 국도로 2.3km만 가면 임하댐이다. 또 이곳에서 차로 10분 안짝에 협동학교 후기 교사로 사용된 전주류씨 정재종택과 무실종택, 수애당이 임하호를 내려다보며 마주하고 있다. 모두 고택 민박으로 이용하고 있다.
●대를 이어 독립운동가 배출한 임청각과 이상룡
낙동강 앞 아흔 아홉 칸 고택은 철길에 잘려 70여 칸만 남았다. 안동댐 보조호수 끝자락 고성이씨 종택인 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일부러 고택을 잘라 철길을 냈다는 이야기는 안동사람들에겐 추측이 아니라 정설이다. 영주에서 연결되는 중앙선 철도가 안동시내를 코앞에 두고 이 앞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거다.
“어떤 경우에든 바른 길을 택해야 함은 예로부터 우리 유가에서 날마다 외우다시피 해 온 말이다…이에 백 번 꺾여도 좌절하지 않을 뜻으로 만주로 옮겨 가 독립운동을 펴겠다”(석주유고 중). 노비를 풀어주고 조상의 위패까지 땅에 묻고 고향집을 떠난 굳은 의지는 동생 아들 손자 조카 등 3대 9명이 서훈을 받는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그 자랑스러운 타이틀은 지금까지도 고단한 가족사와 동의어다. 이상룡의 손부 허은은 만주생활을 담은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에서 “비록 고달픈 발자국이었지만 큰일 하신 어른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라고 적었다. 생전 인터뷰에서는 ‘후회는 없지만 자식공부 제대로 뒷바라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고 회고 했단다. 1932년 중국 지린(吉林)에서 사망한 이상룡의 유해는 1990년에야 조국에 돌아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됐다. “광복이 되기 전에는 유해를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이 실현되기까지 무려 58년이 걸렸다. 이상룡의 부인 김우락은 김락의 언니다.
[주변 관광지]
임청각은 조선 중종 14년(1519)에 지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다. 별당 정자인 군자정엔 이상룡을 비롯한 집안 독립운동가 사진과 이곳에 머물다간 묵객들의 시들이 걸려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따온 임청각(臨淸閣) 현판은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임청각 옆에는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버티고 있다. 바로 앞을 지나는 열차 진동에 시달리고, 시멘트로 보수한 기단이 조악해 국보로서 대접이 소홀한 느낌이다.
임청각에서 약 3km만 가면 안동댐이다. 댐으로 가다가 우측 보조호수 주차장에서 호수를 가로지르는 387m 월영교를 만난다. 다리 중간에 강바람을 쐬며 쉬어갈 수 있는 정자까지 갖췄다. 건너편 언덕 위에는 수몰지구에서 옮겨온 석빙고가 호수를 내려다보고, 왼편으로 가면 안동민속박물관과 수몰지구 민가를 옮겨 놓은 야외민속촌을 만난다. 오른편으로는 보조댐 하류로 약 2km 길이의 호반 나들이길이 이어진다. 호수에 바짝 붙은 산자락 길이어서 시원한 그늘 사이로 강바람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월영교 주차장 부근에 안동의 대표 음식인 헛제삿밥과 간고등어 구이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이 다수 있다.
●안동 독립운동의 정신 예안·도산과 이만도
“옛날 같았으면 예안 장터에서 강변로를 따라 낙동강 상류로 약 10리쯤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앞이 탁 트이는 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이 마을이 바로 부포라는 동네다…역동에서 횃골까지 직선으로 10리가 좋은데 그 사이는 낙동강의 물길이 바뀌면서 생긴 기름진 논밭이 천여 두락이나 된다.” 6·10만세운동의 주역 이선호의 아들 이원정의 회고다(강윤정 저 ‘사적에서 만나는 안동독립운동’에서 재인용).
‘옛날 같았으면’이라는 단서가 뼈아프다. 독립운동가를 수 십 명씩 배출한 부포마을과 하계마을 등 예안·도산면의 유적은 안동댐 건설로 사실상 모두 물에 잠겼다. 자연 재해는 더러 엉뚱한 모습을 드러낸다. 가뭄이 지속되고 댐 수위가 내려가면서 현재 부포마을 앞은 1천 마지기 전답이었을 땅이 드넓은 초원을 이루고, 그 가운데로 실개천이 구불구불 흘러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선호 외에도 만주에서 활약한 이동하, 자결순국으로 저항한 이명우와 권성 부부, 여성 노동운동가 이효정 이병희 등 부포마을에 뿌리를 둔 독립유공자만 14명이다. 그러나 세 집안이 거쳐가며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는 가옥(예안면 부포리 173-3)마저 어떤 표식도 없어 안타까움만 더한다.
퇴계의 후손으로 지역의 큰 어른이었던 향산 이만도가 살던 하계마을도 마찬가지다. 무려 2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은 고스란히 수몰되고, 2004년 마을입구에 세운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도산면 토계리 22-1)만이 씁쓸히 그들을 기리고 있다. 이만도는 1866년 장원급제 후 양산군수를 지냈고, 갑신정변 후에는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다, 경술국치 직후 단식 순절했다. 관직에 몸담았던 대부로서 스스로에게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물은 것이다. 앞서 단식 순절을 결심했던 그의 후학과 집안 조카가 단식중인 그를 방문하고 먼저 보낸 후에야 뒤를 따랐다는 얘기는 유교의 충과 예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다. 이만도의 순국유허비는 하계마을에서 직선거리로 약 7km 떨어진 ‘향산공원’(예안면 인계리 738)에 자리잡고 있다. 그가 순절한 자리다.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響山李先生殉國遺墟碑)’라 쓴 앞면은 백범 김구의 글씨고, 뒷면 공적 글은 위당 정인보가 지었다. 공원이라고는 하지만 도로 옆에 배롱나무 몇 그루 심고 비각을 해 놓은 게 전부다. ?이만도는 김락의 시아버지다.
광복 70주년 기념 창작오페라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 김락’이 안동문화예술회관(15일)과 서울 KBS홀(29일)에서 각 2회 공연된다.
[주변 관광지]
안동시내서 동북지역인 도산과 예안면은 안동댐 건설로 이웃마을이 섬처럼 멀어졌다. 리아스식 해안보다 더 꼬불꼬불하게 물길이 파고든 마을로 제대로 된 길이 난 것도 비교적 최근이다. 부포마을과 하계마을은 직선거리로는 3km 안팎이지만 찻길로는 30km이상 돌아야 한다. 안동에서 태백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로 가다 와룡면사무소에서 933번 지방도로로 우회전하면 예안면 소재지에 닿는데 부포마을은 여기서도 10km, 향산공원은 봉화 재산방면으로 4km 떨어져 있다. 관광편의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것만 바라고 가보라고 권하기는 무리다. 다만 틈틈이 호수를 끼고 한적하게 시골길 드라이브를 즐기기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와룡에서 태백방면으로 약 9km 올라가면 광산김씨 500년 고택 안동군자마을이다. 국가지원 없이 문중의 힘으로 수몰지구에서 모두 이전해 복원했다. 시에서 제안한 황토 포장도 거절하고, 가로등도 고택경관을 헤치지 않게 낮게 설치했다. 조도도 달빛을 기준 삼아 밤하늘을 품을 수 있게 했다. ‘돈 없이는 살아도 정신 줄 놓으면 죽는다’는 부친의 지론대로 김방식 이사장이 고집스럽게 고택을 지켜가고 있다.
군자마을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의 도산서원 일대는 실질적으로 안동의 정신을 이끄는 유교문화의 중심이다. 안동의 수많은 독립운동 역시 퇴계 학맥으로 이어지는 유교적 대의명분과 실천이 바탕이고 동인이었다. 퇴계종택 퇴계태실 퇴계묘소가 도산서원에서 반경 3~4km이내에 있고, 한국국학진흥원과 경상북도산림과학박물관도 인근이다. 이만도의 집이 있던 하계마을은 퇴계묘소 바로 아래다. 하계마을서 고개만 하나 넘으면 원촌마을인데 이곳은 저항시인 이육사의 고향이다. 이육사문학관은 현재 보수공사 중이고, 대신 생가 터(도산면 원천리 706)의 청포도 시비와 동상이 먼 길을 찾아온 여행객을 위로한다.
원촌마을에서 찻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낙동강과 만나는데 이곳부터 비로소 호수였던 강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상류로는 도로가 없고 강 양편 산자락과 강변으로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가송리까지 약 4km 구간 ‘예던길’로 2시간 정도 걸린다. 가송리에는 영천이씨 농암종택이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휘감은 강을 끼고 아늑하게 자리잡았다. 맑은 강물 따라 래프팅과 낚시를 즐기는 풍경이 한가롭다. 가송리에서 조금 올라가면 봉화 청량산이다.
안동=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도움말=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