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유 없이 지하철역이나 길에서 남자들로부터 얻어맞는 여자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이 설마…” 하고 넘어갈 때가. 그것은 나와 내 주변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나의 생활 반경에서 동떨어진, 그리하여 “이 세계에는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예외적인 사건으로 분류되면 그것은 일상적인 사유나 경각심과 멀어진다. 인터넷에서 이런 경험은 자주 “주작(스스로 조작한 이야기)”으로 몰린다.
흥미롭게도 어떤 경험을 주작이라고 ‘감별’하는 사람들의 판단 근거는 대개 자신의 경험치다. 타인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걸러서 보고 진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작년 여름 길을 가다가 술에 잔뜩 취한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맞았을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이 세상은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폭행의 대상이 되는 곳으로, 이러한 일이 매우 빈번하지만, 나의 경험 역시 누군가의 상상력 바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니체는 인간을 유리잔 안에 빠진 파리에 비유했다. 파리는 최선을 다해 세계를 보고 감각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이 놓인 유리잔의 위치나 크기에 따라 제한된다. 열심히 발을 비벼 경험하는 세계 역시 유리잔으로 가로막히듯 남들과는 같을 수 없는 어떤 막으로 덧씌워져 있다. 인간은 이 세계나 타인을 완벽하게 조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불완전한 해석의 주체이다. 한정된 몸과 정신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주변에는 그런 일이 없던데 너는 왜 그러느냐”처럼 타인이 경험하는 세계를 내 틀에 맞추어 해석하는 폭력을 저지르기는 너무나 쉽다.
어찌나 쉬운지, 대부분의 사람이 숨 쉬듯 행하며, 폭력이라고 인지하지도 못한다. 이 틀 안에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꾸려가는 이들에 대한 상상력이 부재한다. 누군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점유하면서도 특정 조건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세계가 구성된다는 상상력, 내가 욕망하는 것이 타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타인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를 열망할 수 있음을 고려하는 상상력 말이다.
누군가의 세계에는 외출했을 때 고통을 감수하며 용변을 참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벽한 경험과 상상 바깥의 영역이다. 그러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구조에 맞춘 공중 화장실 때문에, 각종 성범죄에 노출된 여성은 몰래카메라의 위험 때문에, 성별 정체성이 다른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구역의 화장실을 쓸 수 없는 불편함 때문에 물 마시는 것조차 꺼릴 수 있다. ‘나’에게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생한 일상이 도처에 널려 있다.
한편 ‘다른 가능성’에 대한 상상은 극단적이고 엉뚱한 과잉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호주제 폐지는 국가의 붕괴로, 동성애자들은 무조건 항문섹스로, 낙태는 무조건 미혼 여성의 성적 문란으로 치환하는 폭력이 여기에 해당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이러한 공포는 결국 특정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획일화되고 빈곤한 상상력에서 기인한다.
일명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를 2년째 발간하고 있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와, 삶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비연애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상상력 너머의 삶을 발굴하고 연대하고 지키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짐작했겠지만, 빈곤한 상상력의 권리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히 정치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언제나 “그럴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왜 엄연히 이 세계를 함께 떠받치고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이 내 상상력의 바깥으로 밀려났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빈곤하고 획일화된 상상력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세계에 작은 틈을 내는 것은 이러한 ‘너머’의 상상력이다. 찢어진 틈 사이로, 지금껏 억압되었던 상상력이 샘물처럼 퐁퐁 솟아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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