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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밥타령'에서 해방…아내 인생의 황금기

입력
2015.08.0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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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내 운동 갔다가 출근한데이~.” “아침밥은 묵고 가야지. 이 음식 누가 다 먹으라꼬~.”

요리 배운 후 한동안 우리 집 아침을 깨우는 소리였다. 지금도 가끔 이런 대화가 오간다. 물론 운동 가는 사람은 아내고, 투덜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실컷 밥해 놨는데 휑하니 사라지면 얄밉기 그지없다. 투덜대는 소리가 듣기 싫은지 요즘은 아예 말도 없이 현관을 나선다. 남은 밥은 고스란히 내 몫이다. 바로 내가 살찌는 이유기도 하다.

지금 아내는 인생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 유달리 운동을 좋아하는 아내는 아침이면 자전거를 타고, 저녁이면 야산을 탄다. 주말이면 하루는 자전거, 하루는 등산에 쏟아붓다 자투리시간을 가족들에게 쪼개준다. 그 시간 한번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며칠 전에는 아내가 평일 이틀 휴가를 내서 설악산 무박2일 산행을 다녀왔다. 새벽 한 두 시부터 13시간 정도 설악의 산봉우리를 걷는 죽음의 코스다. “같이 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는 아내가 고맙기는 한데 빈자리는 내가 채워야 한다.

아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면 남편들은 며칠 내내 곰국만 먹어야 한다고 불평한다. 이 정도면 양반이다. 내가 요리를 잘 하지는 못해도, 먹을 정도로는 만드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아내는 곰국 끓이기마저 중단했다. “냉장고에 쇠고기 조금 있으니, 된장을 끓여 먹든 카레를 해 먹든 알아서 해 먹어요. 애들 부탁해~.”

가끔 남편 눈치를 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아내의 인생이 황금기 사촌 정도는 될 것이다. “내 인생에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올 들어 아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다. 나도 좋아서 요리하는 것은 맞는데, 부부 가사노동의 축이 내게로 기우는 걸 보고 있으면 똑같은 소리가 내 입에서도 나온다.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이게 머꼬.”

남편 밥타령으로부터 해방된 아내가 평소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시간에 자전거를 타러 집을 나서고 있다.
남편 밥타령으로부터 해방된 아내가 평소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시간에 자전거를 타러 집을 나서고 있다.

아내의 인생에는 세 번의 해방이 있었다. 본인의 고백이다.

첫 번째는 바로 대중교통으로부터 해방, 자가용을 산 일이다. 신혼 때부터 딸내미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까지 아내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출근 때는 내 프라이드 승용차에 동승했지만 시댁에 큰 딸, 친정에 작은 딸을 맡길 때마다 버스와 택시, 아니면 도보로 교통문제를 해결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러던 아내가 경차를 하나 장만했다. 이동이 자유로워지고부터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행동반경이 엄청나게 넓어졌다. 나도 덩달아 수송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맞벌이 부부가 각자 자가용을 장만하는 것은 속칭 ‘윈윈’에 가깝다.

두 번째는 자녀로부터 해방이다. 대학 1학년인 큰 딸은 고교 3년을 학교 기숙사에서 보냈다. 아내가 처음 딸을 떠나 보냈을 때는 엄청 서운해 하더니, 나중에는 방학 때 집에 있는 기간이 너무 길다며 구시렁거렸다. 둘째 딸은 고등학교를 아예 타지로 보내버렸다. 올해 2학년이니, 딸내미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 것은 지난 한 해 1년간이었다.

입시 준비한다고 한창 바쁘고, 예민한 이 시기에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게 안쓰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엄청 고마웠다. 학원에서 밤늦게 귀가하는 수험생 자녀들의 수송부터 식사 등 문제로 골병 든 학부모들을 볼 때마다 “우리 딸은 효녀”라고 되뇌었다.

두 딸 모두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아내의 자전거와 등산, 나의 음주모임 모두 궤도수정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큰 딸이 대구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름대로 사회인이 된 딸은 알아서 모든 것을 뚝딱 해치운다. 방학 시작하자마자 농촌활동도 다녀왔다. 시쳇말로 ‘칼 끼 없다’(불평할 것이 없다). 이제는 작은 딸만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칼 끼 있다’ 해도 괜찮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남편의 밥타령으로부터 해방이다. 간식에는 관심 없고 주식은 죽어라고 챙겨먹는 남편 밥 수발로부터 아내는 탈출했다. 오히려 남편이 차린 음식을 피해 다녀야 할 지경이 됐으니 아내가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구속에서 해방되기는 했으나 아내가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설거지와 집안청소, 쓰레기 배출 등을 더 부지런하게 뚝딱 해치운다.

아내는 자가용과 기숙사, 요리 덕분에 해방을 맛보고 있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내는 대학시절 장인의 귀가시간 제한조치에 따라 오후 9시까지 집으로 돌아와야 했고, 직장을 잡고 난 후에도 오후 10시까지로 겨우 1시간 연장됐다. 그러던 아내는 결혼 후 통금에서 전면 해방됐다. 아내의 해방은 바로 나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전준호기자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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