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젊은이들 8번째 우정의 항해
양국 1000여명 평화의 사절단
열흘간 역사·문화·사회 등 토론
상호존중과 신뢰 움틀 기회로
인류사에서 변치 않는 교훈 중에 ‘원친근공(遠親近攻)’이란 게 있다. 멀리 있으면 다투고 미워하고 공격하고 감정 상할 게 없지만 가까이 있으면 이러하든 저러하든 감정 상할 게 많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섬나라인 일본은 대륙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한반도를 발판 삼아 대륙 진출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같은 자연재해에 대한 불안심리를 극복하려는 ‘원시뇌’가 작동했는지도 모른다.
대학시절에 역사공부를 하면서 만약 일제 침략 34년 11개월 19일이 없었다면 우리 영토와 국민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리 없고 6?25 전쟁의 처절한 비극도 생기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일본은 나 혼자라도 쳐들어가고 싶은 나라였다. 일본이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며 기세 등등할 때 적어도 ‘리플증후군(거짓말을 하고도 사실로 착각하는 정신질환증세)’을 벗어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일본은 오만을 벗어 던지지 못했다.
뇌신경심리학자 이언 로버트슨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권력을 쥐거나 힘이 강해지면 뇌구조가 바뀐다고 했다. 과학적으로 도파민, 테스토스테론 등 호르몬이 정상인보다 많이 분출되어 강한 인간으로 변화시키지만 터널에 갇힌 것처럼 시야가 좁아져 타인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지 못해 공감능력이 약화되고 공격성향이 늘어난다고 했다.
북방의 빼앗긴 4개의 섬에 대해서는 당시 소련에 삿대질 한번 못하면서 역사적으로 한국 땅이 분명한 독도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시비를 걸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른바 위안부라는 성노예 여성들을 폄하하고 침략사를 부정했으며 혐한 활동이 잦아졌고 나라의 지식공동체여야 할 교과서를 왜곡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몇 차례 북한을 방문하면서 가슴이 몹시 아팠던 것은 분단 70년 만에 같은 민족임에도 관상이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대로 더 시간을 끌면 평화적인 통일을 해도 남북갈등을 해소하기 벅차다는 걸 대번에 느끼게 된다.
그런 저런 아린 가슴을 안고 지내던 참에 환경재단 최열 대표에게 ‘피스 & 그린보트’ 얘기를 들었다. 광복 70주년과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 시민이 한배를 타고 아시아의 환경과 평화 더 나아가 역사와 사회, 문화와 안전 문제 등을 토론하고 동아시아 공동이슈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행사에 동참해달라고 했다.
내가 선뜻 동참하기로 한 것은 일본의 피스보트는 과거 일본의 역사적 잘못을 반성하고 그런 역사의 현장을 방문, 확인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자는 양심적 진보 시민단체였기 때문이다. 요시오카 다츠야(吉岡 遠也) 피스보트 대표를 행사 중에 만나 간결하게 물었다. 역사적으로 한국 땅이 분명한 독도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자 그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일본의 주장은 합리성이 떨어진다.”
그러면서 일본의 정치와 미디어들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선전하고 교과서까지 왜곡하는 바람에 요즘에는 일본인들도 그런 줄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했다. 일본인들의 혐한 문제도 명쾌하게 말했다. “남을 존중해야 내가 존중 받는다. 친구가 되려면 먼저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전쟁이 가장 큰 환경파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함께 손잡고 한일문제 뿐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환경 공동체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풀릴 기미가 없는 한국과 일본의 현안 문제에 대해 이번 행사를 주관한 최열 대표는 더욱 명쾌했다. “평화와 환경 문제는 전 지구적인 연대가 필요한 인류의 최대 과제다.” 국가가 풀지 못하는 갈등의 고리를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한걸음 먼저 내딛는 경쾌한 교류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
피스&그린보트는 광복 60주년이던 2005년 첫 항해를 시작했다. 올해 여덟 번째인데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고 한일 수교 50주년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해보자는 행사로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500여 명씩 참가했다. 따가운 햇볕에 땅이 멀미를 할 것 같은 염천, 8월 2일부터 11일까지 열흘 동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홋카이도, 나가사키, 후쿠오카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오는 바다와 하늘과 육지와 배가 평화와 환경과 역사와 휴머니즘을 함께 수놓는 장정이다. 서울 떠날 때는 빗발이 촉촉했는데 남녘은 햇살이 짱짱했다.
2일 부산에서 출국 수속을 하고 배에 오르자 일본 피스보트 멤버들이 반갑게 마중했다. 비록 언어가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지만 평화롭고 깨끗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여서 웃음과 악수와 눈짓으로 쉽게 상통했다. 출항을 알리는 행사장에서 두 나라 젊은이들은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한 채 합창을 했다.
이런 따뜻한 민간 교류가 한일의 평화, 나아가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노래 가사지만 ‘괜찮아’를 목청껏 따라 부르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서로 ‘반성하고 평화와 환경의 파수꾼이 되어준 당신은 괜찮아’‘사과를 받아주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밝은 세상을 지키려는 당신은 괜찮아’를 합창하는 것 같았다. 휠체어를 타고 온 일본 할머니와 목발을 짚고 온 일본 여성을 보면서 일본인 중에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있어 일본이 지탱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 나 혼자만의 위로는 아닐 것 같았다.
세계는 무한경쟁의 시대다. 테크노헤게모니, 경제, 군사, 생명공학을 비롯하여 누가 선점하고 누가 탈락하느냐 하는 총성 없는 세계대전 양상이다. 동아시아가 빠르게 진격하지만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제 한ㆍ중ㆍ일 3국의 협연이 절실해졌다. 영토 분쟁이나 역사문제, 외교 갈등이나 경제 마찰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한ㆍ중ㆍ일 3국의 미래지향적 발상의 전환이 절실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 일본은 조건 없는 반성과 사과와 배상을 하는 진정한 참회를 해야 한다. 여기서 참(懺)은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지은 모든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요, 회(悔)는 지금으로부터 미래에 이르도록 지을 모든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숙명적 열등감인 가면증후군(imposter syndrome)을 벗어날 수가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북통일을 적극 거들어주는 진정성을 모색해야 한다.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되면 일본에서 한국의 부산까지 해저터널을 뚫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일본에서 기차와 자동차를 타고 한국, 중국, 러시아, 유라시아를 관통하고 유럽으로 큰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러면 비로소 일본의 대륙콤플렉스는 해소되는 것이다.
발효와 썩음은 한 끝 차이다. 발효된 것은 인체에 유익하지만 썩은 것은 해코지를 하기 마련이다. 용서를 빌고 흔쾌히 사과하는 것은 스스로 발효가 되어 이득을 얻지만 잘못을 변명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용서 대신 말재간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것은 썩은 가치인 걸 일본이 어찌 모르겠는가.
다행스럽게 피스보트와 같은 양심적이고 진실을 추구하는, 선근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희망의 불꽃을 보게 된다. 인생도 국가도 제 양심을 지키면 발효요, 제 이익만 지키면 썩은 걸 취한 것이고 으레 탈이 날 수 밖에 없다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참으면 병(病)이 되고 터트리면 업(業)이 된다고 했다. 일본은 경제력을 믿고 스스로 고립되는 줄 모른 체 세계사의 비겁자로 전락하고 있는 형상이다.
어떤 일을 당하는 게 운명이 아니라 일을 당했을 때 반응하는 내 모습이 운명이라고 했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일어 날 것들을 예측하는 것을 예측코드(predictive coding)라고 한다. 일본의 침략과 수탈과 인권침해가 업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조건 없는 진솔한 반성과 사죄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적극적으로 거들어야 한다.
한번 상상해보라. 통일된 한국을. 일본에서 해저터널로 부산을 거쳐 기차와 자동차로 중국, 러시아, 유럽을 내달리게 되는 날을. 그러면 일본이 그토록 병이 되었던 대륙콤플렉스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도약을 꿈꿀 수 있지 않겠는가. 한일 두 나라의 화합은 결국 한ㆍ중ㆍ일 동아시아 3국이 세계 문명국가로 당당하게 발돋움하게 될 것을 왜 상상하지 않는가.
광복 70주년과 한일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한일 두 나라의 평화와 환경공동체가 신뢰와 상호존중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천하 없는 보석이라도 땅에 묻으면 표식을 해두어야 하지만 좋은 씨앗을 심으면 표식이 없어도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이번 피스&그린보트에 참여한 두 나라 사람들이 참 좋은 평화의 씨앗임을 알게 되어 기쁘고 고맙다.
김홍신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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