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 방광사에는 이총(耳塚) 이라는 무덤이 있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귀무덤이지만 실제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입한 왜적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리품으로 바치기 위해 무고한 양민들의 코를 베어 가져와 조성한 코무덤이다. 그렇게 베어온 코의 수가 20만에서 30만을 헤아렸다고 하니, 한국인으로서 전란 당시 왜군의 잔혹성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오를 일이다.
당초 이름은 코무덤을 뜻하는 비총(鼻塚)이었지만, 19세기 초 일본의 학자 하야시 라잔이 이총으로 바꿔 불렀다고 전한다. 그 역시 코무덤이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지간히 충격적이고 야만적이었던 모양이다.
비총을 굳이 이총으로 명칭 변경한 데서 그나마 느껴졌던 반성의 기미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추종자들은 청일전쟁 발발 직후인 1898년 이총수영공양비(耳塚修營供養碑)를 세우고 전쟁광 히데요시의 업적에 대한 상찬을 비문에 채워 넣었다.
“타국과 전쟁을 하는 것은 국가의 힘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지,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후략) 이 무덤은 일본의 세력 확장의 상징이자 풍공(豊公ㆍ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덕의 유물이다. 조선과 일본은 상조해 발전해 나가야 할 입장에 있고, 다른 나라에 앞서 독립을 돕고 청일전쟁을 통해 우의를 완수한 경과가 있다.”
그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전리품 차원에서 코를 벤 행위를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다’라는 논리적 회괴함이란.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 오랜 세월로 마모된 이 비문을 어느 누구도 복원하려고 하지 않는 이면에는 궤변의 도가 상식의 선을 넘어섰음을 자인하기 때문이리라.
일본은 “하지 마”라는 직접 화법보다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완곡한 화법을 고급스런 표현으로 인식한다. 이를 상대방을 배려하는 문화적 자부심으로 연결짓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화법을 교묘히 악용, 궤변으로 변질시키는 이들이 일본 우익세력 사이에 적잖이 존재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기 보다는 차라리 할복으로 죽음을 택한 과거 무사 문화의 잔재로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간 사안을 논의하는 외교 현장에서는 이런 화법이 잦은 논란을 일으킨다.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1990년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두고 ‘사죄’나 ‘반성’이 아닌 ‘통석(痛惜)의 염’을 언급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취재 현장을 경험한 일본의 한 원로 기자는 “일본 궁내청이 선택한 ‘통석’이라는 단어는 일본 대다수 언론조차 처음 접하는 단어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일본인 조차 생소한 단어 선택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사죄하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내부적으로는 사죄가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도임을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시도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들어 더욱 두드러진다.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찾아 참배한 뒤, “부전의 맹세를 다지기 위해서”라고 강변했고, 위안부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河野)담화를 계승하겠다면서도 담화가 한일 양국간 외교적 뒷거래를 통해 만들어진 산물로 격하했다. 일제 시대 조선인 강제 노동 현장이 포함된 메이지 시대 근대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이중적 행태는 외교적 수사가 궤변으로 변질된 대표적 사례다.
아베 총리는 2006년 저서 ‘아름다운 나라’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요약한 바 있다. 전후 체제 탈피, 타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 9조 개정, 집단적 자위권 허용을 통한 강한 나라 만들기를 이뤄내 세계 각국의 신뢰와 존경을 얻겠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죄가 빠진 빈 껍데기 철학은 지지율 급락만을 가져오며 정치 생명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열흘 앞으로 다가온 아베 담화 역시 진정성 있는 내용이 담기지 않을 거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아름다운 나라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베 총리는 언제쯤 깨닫게 될 지 궁금하다.
한창만 전국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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