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맹이 아들 둘이 있는 우리 집 아침은 늘 분주하다. 뚝딱뚝딱 야채를 다지는 소리가 한참 나고 나면, 아이들 앞에 볶음밥이 놓여진다. 또 볶음밥이냐며 툴툴대던 큰 녀석이 이내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며 잘도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때가 문득 떠오른다.
17년 전 이야기다.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는 시간들이 지나고, 열 손가락이 채 안될 만큼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간부식당 취사병 두 명이 갑작스런 금품갈취로 모두 영창을 가게 되었고, 제일 한가로워 보이는 나를 주임원사가 취사실에 세워 놓았다. 점심시간은 다가오고 짬밥은 내가 제일 많이 먹은 처지. 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 뭐 있는 것 없는 것 다 넣고 볶으면 되겠지”란 생각에 메뉴는 볶음밥. 그때까지 요리란 혼자 끓여먹던 라면이 전부였던 나는 그렇게 50인분의 식사를 준비해 내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반전이 있을 수 있을까! 전우들이 정말로 맛있게 주방 초보가 만들어낸 전쟁 같은 볶음밥을 정신 없이 먹고들 있는 것 아닌가. 누가 뺏어갈세라 허겁지겁 밥술을 들이키며 맛나게 볶음밥을 흡입하고 있는 전우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 속에 뭔가 알 수 없는 짜릿함이 전해왔다. 군대 와 제대를 며칠 앞두고 처음 느낀 보람이고 감동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알았고, 요리의 세계에 들어서기로 단호히 결심했다. 경영학과만을 고집하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요리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볶음밥은 간편하면서도 은근히 까다로운 음식이다. 이것저것 대충 넣고 볶아내면 볶음밥이라고 생각했던 건 한가로운 말년병장 시절의 이야기이고, 셰프로서 볶음밥은 쉬워 보이지만 결코 만만찮은 요리다. 중화요리에서 볶음밥의 위상은 요리사의 기본적인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잣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웍(볶음 요리용 중국 냄비)을 돌리며 낱낱의 밥알에 불향을 입히면서 적당한 기름이 배게 만드는 기술, 이게 바로 셰프로서 알게 된 맛있는 볶음밥이다. 기본적으로 간장과 소금으로만 깔끔하게 간을 하기도 하고, 때론 굴소스를 쓰기도 했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볶음밥을 해줄 때는 밥에다가 참기름, 소금, 깨소금으로 간을 한 후 볶은 야채를 같이 넣고 센 불에 한번 휙 볶아서 준다. 그렇게 하면 보통 볶음밥처럼 밥알이 너무 딱딱해지지 않아 부드럽게 먹일 수 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패리스 호텔에 있는 에펠타워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였다. 패밀리 밀이라고 같이 일하는 요리사들 식사를 준비하는데, 오븐에 점화를 하는 순간 불길이 확 일어나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마 그 전부터 가스가 새고 있었던 듯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얼굴과 팔 등에 화상을 입은 채였다. 웬만한 털들은 자연스레 제모가 되어 있었다. 키친에서 일하다 보면 손에 크고 작은 상처들을 달고 살기 마련이지만, 이 일이 가장 큰 사고로 기억된다. 공교롭게도 이날 메뉴는 볶음밥. 그때 이후로 나는 절대 오븐 점화를 하지 않는다.
내 나이 24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니, 남들보다 늦다면 늦은 나이에 시작한 요리다. 요리를 한다는 건 상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걷게 된 그 길에 난 푹 빠져 있었고, 그 길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버티고 노력했다. 덕분에 내가 먹고 자란 우리 음식이 아닌 그들의 음식으로 외국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미국 최고의 식당 ‘일레븐 매디슨 파크(Eleven Madison Park)’에서 부주방장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직 그 길 끝에 서진 못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여전히 즐기고 있다.
가끔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나조차도 잊을 때가 있다. 모든 직업과 일들이 그렇겠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의 꿈을 잊은 채 현실과 타협하게 되는 순간들도 오게 마련이다. 그럴 땐 야채와 고기를 잘게 다져 아이들에게 볶음밥을 해주며 초심을 되새기곤 한다. 그때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잊지 않고 느낄 수 있도록. “아들. 오늘 아빠 볶음밥은 어때?” 아들이 행동으로 답한다. “Two thumbs up!!”
*송훈 셰프는 오스테리아 꼬또, 투뿔등심, 붓처스컷 등을 운영하는 SG DINEHILL 총괄셰프 이다. 미국 CIA 요리학교 졸업 후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그래머시 태번’, ‘마이알리노’ 등에서 일했고,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위에 오른 뉴욕의 ‘일레븐 매디슨 파크’ 부주방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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