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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피해’의 차별

입력
2015.08.0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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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6일)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날이다. 9일에는 나가사키.

이 글을 히로시마에서 쓰고 있다. 원폭문학연구회가 주최하는 전후 70주년 워크숍에서 발표를 하기 위해, 원폭에 관한 기억이 가장 생생하게 부활하는 시공간에 있다. 1960년대 활발했던 일본의 원폭문학과 핵 담론의 ‘자폐적’ 구조에 관한 발표를 한다. 여전히 ‘핵 피해국’으로 치장되는 일본의 ‘전쟁피해’ 담론은 이 시기의 많은 문학 작품에 공습과 원폭 피해의 기억의 기술을 통해 성립되었다. 물론 조선인 등 다른 정체성을 갖는 피해자들의 문제를 애써 외면하며 얻어낸 효과다.

미국은 당시 전략적 폭격 대상이 아니었던 ‘깨끗한’지역을 골라 종류가 다른 두 개의 원폭을 투하했다. 가지고 있던 완성품 두 개를 다 사용했기 때문에 원폭의 파괴력을 실험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아왔다. 원폭투하 70년은 인류 최악의 인체실험의 시간이었다. 그라운드 제로(피폭지)에 가까운 지점에 있던 이들은 검은 잿더미가 되었다. 살아서 신분의 위계관계가 달랐던 일본인과 징용된 조선인, 중국인 모두 원폭의 위력 앞에서 경계 없이 녹아 내리고 재와 먼지로 섞였을 것이다. 설령 살아남았다 해도, 전신 화상을 입고 별다른 치료를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고 흉측한 외상으로 인해 평생 지고 갈 또 다른 차별을 불러왔다. 그뿐이랴. 내부 피폭을 당한 이들 역시 전례가 없는 원자병의 고통과 불안 속에서 ‘유전된다’는 차별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일본에 오기 전까지 원폭의 참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원자폭탄이 없었으면 식민지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했다는 ‘설’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때까지 나의 전쟁관은 미디어와 B급 대중소설을 통해 형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 근현대문학을 연구하게 된 한국의 유학생에게 ‘전쟁’은, 일본 현대문학을 관통하여 피할 수 없는 심연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의 ‘국문과’ 학생들에게 지난 10년 동안 전쟁론을 강의하고 있다. 해마다 바뀌는 학생들에게 나는 첫 수업에서 ‘8월 15일은?’이라는 질문을 꼭 한다. 믿을 수 없겠지만, 200명이 넘는 수강생 중에 ‘추석이요’와 ‘몰라요’라고 답한 학생이 20%를 넘는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과거에 관심이 없기도 하지만, 역사적 숫자 이외에 더 알아야 할 것이 없지 않느냐는 시큰둥함이었다.

거대담론이 만들어내는 ‘역사’는 개인의 ‘삶’을 숫자로 환원하고 더 이상 알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심적인 일본의 지성은 문학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만행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려 한다.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자들에게 어떤 형벌이 내려져야하나? 이것은 일본의 원폭문학에 잠재된 테마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오다 마코토(小田實)의 ‘HIROSHIMA’는 원폭희생자들 복수를 위해 그라운드 제로의 흙을 가득 실은 헬기가 백악관 정원에 서있는 미국 대통령과 쇼와 일왕을 덮치는 장면으로 끝난다.

많은 일본의 피폭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고통을 국가적인 ‘전쟁 피해’ 담론으로 이용당했다. 그렇지만 그들 덕에 ‘전쟁 피해’ 담론을 구축할 수 있었던 일본이라는 국가와 피폭 피해를 당하지 않은 일본인들에게 오히려 차별을 받았다는 것이 원폭문학의 큰 흐름이다. 하지만 히로시마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피폭을 당했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시각이 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공원 밖에 떠돌던 조선인 위령비는 20세기가 끝나는 1999년에야 겨우 평화공원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추모하러 온 일본의 정관계 인사들은 모른 척 스쳐 지나간다. 피해에도 위계가 있고 차별이 있는 모양이다. 민족과 국가를 넘어 인간과 인류의 피해를 외치고 있는 평화공원의 내 외침 위로, 새로운 ‘제국’을 꿈꾸는 졸렬한 위정자들의 차별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고영란 일본 니혼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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