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8월 3일 새벽 0시 대통령 긴급명령 제15호가 공포된다.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이른바 ‘8ㆍ3조치(사진)’였다. 정부는 기업이 쓴 사채 이자율을 월 1.35%(당시 평균 월 3.84%)로 대폭 낮추고, 상환조건도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으로 일괄 조치했다. 저 이자율(연 16.2%)은 당시 물가상승률(16%)을 감안하면 사실상 제로금리였다. 한마디로 국가가 은행도 아닌 개인-기업간 돈 거래에 개입해 기업에 전대미문의 선심(특혜)을 쓴 거였다.
배경은 대충 이랬다.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10년간 한국 경제는 연평균 9.3% 성장한다.(세계경제는 5.4%, 대만ㆍ일본은 각각 10.1%, 8.6% 성장했다.-세계은행 자료) 하지만 물가 상승률이 성장률을 웃돌았다. 같은 기간 한국의 평균 인플레이션율은 12.4%(일본 5.7%, 대만 2.9%)였다.
70년대 들면서 세계 경제 성장세가 둔화한다. 한국 기업엔 비상이 걸렸다. 베트남전쟁으로 무역ㆍ재정적자에 허덕이던 미국이 수입품 관부과세(10%)를 인상하자 한국 정부는 환율을 18%나 올린다. 환율 인상은 수출에는 도움이 됐지만, 외화부채 상환에는 독약이었다. 66년 외자도입법으로 차관을 끌어다 쓴 기업들은 이자ㆍ원금 상환 부담이 커졌다. 즉 자금난이 심화했다. 내내 저임금에 시달려온 노동자들은 인플레(물가 상승)로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기업들은 연리 46%에 달하는 고리 사채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기업 줄도산 위기라는 전경련의 읍소에 정부가 내놓은 처방이 8ㆍ3조치였다.
기업이 신고한 사채는 약 4만 건, 3,456억원이었다. 기업에 돈을 빌려줬다니 이른바 ‘명동 큰손’들만 생각하기 쉽지만, 신고 건수의 약 90%는 “집 팔아 전세 살며 이자로 자식새끼 공부시키겠다”고 나선 300만원 미만 소액채권자들이었다. 사채 동결 이후 그들의 딱한 사연과 자살 소식이 잇따랐다. 반면 기업주가 자기 기업에 ‘사채 놀이’한 돈이 1,137억원에 달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8ㆍ3조치는 전대미문의 초법적 특혜였다. 물론 그 조치가 없었다면 이듬해인 73년 10월의 오일쇼크(원유가가 석 달 새 4배 폭등)에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했을 테고 3차경제개발(중화학공업 육성)도 차질을 빚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국익’에 보탬이 됐다는 옹호론도 있다. 8ㆍ3조치로 더 심화한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기업 모럴해저드(사채를 더 쓴 기업이 더 혜택 받는)는 97년 IMF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