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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한 경고 "노동시간 줄이고 일자리 나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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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한 경고 "노동시간 줄이고 일자리 나눠라"

입력
2015.08.02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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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 패러다임 극복

자아실현 위해 자율적으로 일하고 최소한의 생활 위한 소득 보장해야

세대 간 분열 야기하는 고용 대책

임금피크제 등 장년층 양보가 아닌 청년고용 할당·근로시간 단축 필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서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영국 여자와 결혼해서 프랑스에서 저널리스트로 살다가 불치병에 걸린 부인과 함께 자살한 철학자가 있다. 앙드레 고르다. 고르(1923~2007)는 들뢰즈(1925년생) 및 푸코(26년생)와 같은 세대다. 미국 쪽에는 토마스 쿤(22년생), 말콤 엑스(25년생), 앤디 워홀(28년생), 촘스키(28년생) 등이 비슷한 나이다.

고르가 나서 자란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출신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에 묘사되어 있는 대로 매우 무기력하면서도 엉뚱한 사회였다. 오스트리아가 1938년에 독일과 합병되자 고르의 어머니는 나치의 징집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 그를 스위스 로잔으로 보낸다. 거기서 고르는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평생의 반려자인 도린을 만난다.

1949년 파리로 이주한 그는 ‘파리-프레스’를 시작으로 해서 ‘렉스프레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의 생활을 하게 된다. 또한 그는 사르트르가 디렉터로 있었고, 찰리 채플린의 이름을 따서 만든, 유명한 잡지 ‘현대’의 편집에도 참가했다.

사르트르, 마르크스, 뒤몽에 영향 받아

고르가 사르트르를 처음 만난 것은 1946년이었는데 고르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현상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고르의 처녀작 ‘배반자’(1958)는 자전적 에세이인데 사르트르가 서문을 써주었고 책 자체도 사르트르로부터의 강력한 사상적 영향 아래 쓰여졌다. 고르의 훗날 회고에 의하면, 이반 일리치와 장-마리 뱅상도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일리치는 반제도주의적 사고방식을 전해주었고, 정치학자 뱅상은 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관해 큰 깨우침을 주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중후반까지 실존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인 마르크스주의 입장에 있었던 고르는 개인의 자율성이라든가 소외와 같은 사상적 주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40대 중반에 1968년 프랑스의 6월 혁명을 거치면서 사상적 변화를 겪게 된다. 여기에는 그 전부터 그가 이탈리아 좌파들과 교류를 해 왔고,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이르러 이반 일리치에 빠져든 게 작용했다. 고르는 ‘현대’지의 주요 인물들과 결별함과 동시에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좌파 내 마오주의 분파들과도 분명한 선을 긋게 된다.

1975년에 고르는 ‘생태주의와 정치’라는 중요한 저작을 내놓는다. 이 저작 안의 논문 ‘생태주의와 자유’는 훗날 ‘생태주의 문제를 다룬 초석적 텍스트 중의 하나’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정치적 생태주의, 혹은 생태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정초해낸 이 저작에서 그는 철저하게 반경제주의, 반공리주의, 반생산주의 입장을 취하는데, 생태주의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생산-소비 시스템 자체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는 반자본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의 기본 통찰을 받아들이면서도, 마르크스 사상에 내재해 있다고 그가 여기는 생산중심주의적 경향까지도 극복하려고 했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인류학자 루이 뒤몽의 영향이 작용했는데, 뒤몽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사상 역시 일정하게 경제주의적 편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기수는 ‘비정규직’

1980년 고르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안녕’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출간한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혁명적 역할에 대한 전통적 신념과 인식을 밑뿌리에서부터 뒤엎는 이 저작에서 고르는 자본주의 기술과 생산 시스템은 이미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오염시켜 버렸다고 주장한다. 즉,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생산력에는 자본주의의 본성이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으므로 그 생산력은 사회주의적으로 경영될 수도 작동될 수도 없는 것이며, 그런 생산력 발전과 더불어 탄생해서 바로 그 생산력에 연루되어 온 한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의 담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르는 ‘새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에 주목한다. 유럽어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집단적 계급을 가리키고 프롤레타리아는 그 구성원 개개인을 가리키는데, 고르의 새 프롤레타리아는 “불안정한 보조직, 기간직, 구 기술의 노동직, 대체직, 파트타임 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이 없는 사람들”, 즉 요즘 말로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 혹은 프리케어리어트(불안정노동자)다.

이 다음부터 고르의 사상 전개는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거의 일직선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이 필요하고, 모든 시민에게 국가가 기본 소득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 소득은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고르의 육성을 들어보자.

“생태사회적 정치는 주로, 노동 시간 및 노동 자체와 상관없는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데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재분배하여 누구나 일할 수 있고 이를 좀 더 잘하면서 덜 하도록 하는 데 있다. 노동에서 놓여난 시간을 개개인이 그들이 선택한 활동, 즉 그들의 시장 의존과 직업적 혹은 행정적 책임을 줄여주고, 직접 체험된 연대의식과 사회성의 조직, 즉 상호부조, 서비스 교환, 무정형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조직을 다시 짜게끔 해줄 재화와 용역의 자가 생산을 포함한 활동에 쓸 수 있는 자율성의 공간을 창출하는 데 있다. 시간의 해방, 기능적으로 특화된 타율적 노동의 해방은 전체를 아우르는 정치로서 구상되어야 한다.”

쉽게 말한다면, 돈을 벌기 위해서 노동을 하고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판 대가로서 임금을 얻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자아실현을 위해서, 또 재미와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며, 또 일을 한 시간과 관계없이, 인간다운 최저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의 소득을 사회가 개인들에게 균등하고도 무조건적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러한 기본소득 주장에 대해서, 당연히 찬반의 견해가 갈릴 수는 있을 것이다.

생산시스템 혁명에 대한 고민 시작해야

하지만 어쨌든 간에 고르 주장의 합리적 핵심은 인간의 노동이 타율적, 노예적인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되며, 또한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은 생태를 파괴하면서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생태적 파국을 향해서 치닫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것이며, 또한 타율적 노동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 임금 시스템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청년 실업이 사회의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청년 실업은 1990년대 후반 외환 위기를 전후해서 시작된 일이지만 요즘 아주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일보에서도 “청년고용, 빙하기 온다”는 특집을 꾸민 바 있다. 반면, 사회 일각에서는 장년층이 양보해서 청년에게 일자리를 줘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이런 주장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은수미 의원에 의하면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키면서 세대간 분열과 이간질을 꾀하는 것이다. 이명박정부 때는 젊은 신입사원들의 월급을 깎으면서 대졸 청년을 공격했다가는, 이제 청년 세대를 위하는 척 하면서 임금피크제 같은 엉터리 정책을 들고 나와서 부모 세대의 임금을 깎으면서 50대 중산층을 공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민들의 담뱃값은 거침없이 곱절 가까이 올리면서 법인세는 계속해서 깎아준 결과 대기업들은 710조원이 넘는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데, 대기업 위주의 이러한 경제 정책으로 인한 실패를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모두의 탓으로 돌리면서 세대 사이를 분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은수미 의원의 진단과 주장에 찬성한다. 공공 부문 및 대기업에 청년고용 할당제를 엄하게 실시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정 거래 관행을 혁파하면서 중소기업 위주로 경제 정책을 꾸려나가고, 더 나아가서는 근로시간 자체를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만 청년들에게 일자리가 열리며, 또 청년들이 중소기업에도 기꺼이 취직하려 할 것이다.

대기업으로서도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삼성의 경우, 외국 자본의 도전으로부터 경영권을 보장해 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국민’연금이었고, 형제끼리의 지저분한 재산 다툼 과정에서 재벌 스스로가 “롯데는 국민 여러분의 것”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더 나아가서 앙드레 고르처럼, 우리가 지금과 같은 생산 시스템에 계속 갇혀있을 건가도 다시금 물어봐야 한다. 다르게 살기 위해서는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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