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살인 누명 사형 선고, 결백 주장에도 유죄 판결
2014년 극적인 무죄 석방
진범 있다는 진술 듣고 재수사, 원심 무효화 바로 풀려나
보상 한 푼 없이… 불운한 삶
출소 두 달 만에 폐암 말기 진단, 법원 "배상 불가'" 또 不義
1급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은 죄수가 근 30년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그리고 출소 2개월 뒤 폐암 판정을 받고 1년여 간 투병하다 숨졌다. 6월 29일 작고한 미국 뉴올리언스의 흑인 남성 글렌 포드(Glenn Ford)의 삶이 그랬다. 더 어이없는 건 주 정부의 손해배상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생계와 투병 비용을 대야 했다.
글렌 포드와 같은 사연은 적어도 자국민에 관한 한 가장 훌륭한 법치와 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췄다는 미국에서조차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2002년 이후 지난 6월 말까지 사형수로 형 집행을 앞두고 있다가 무죄로 석방된 사례만 115건이다.(2014년 5월 10일자 이 코너의 주인공 ‘루빈 카터’는 살인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가 19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경우였다.)
드문 일이 아니라면서 굳이 글렌 포드의 사연을 들춰본 까닭은 1983년 그를 살인죄로 기소했던 당시 지방검사 마티 스트라우드(Marty Stroud)를 기억하고 싶어서다. 그는 지난해 포드의 무죄 사실이 법원에서 확정된 뒤 지방 신문에 감동적인 반성문을 썼다. 그의 결백 증거를 공개한 또 다른 지방 검사 데일 콕스(Dale Cox)도 있다. 완고한 사형제 옹호론자인 데다 포드의 결백을 믿지도 않으면서도 그는 29년이 지난 시점에 검찰로서는 치욕이 될 증거를 공개함으로써 포드의 진실을 다시 법정에 세웠다.
살인사건은 1983년 11월 5일 루이지애나 주 슈리브포트(Shreveport)라는 도시에서 발생했다. 보석상 주인 이사도르 로즈먼(Isadore Rozeman, 당시 58세)이 무장강도가 쏜 총에 숨진 거였다. 경찰은 4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 그 중 한 명이 로즈먼의 파트타임 정원사였던 34세의 글렌 포드였다. 범행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고 지문을 비롯한 그 어떤 유죄 입증 물증도 없었지만, 모든 정황이 포드에게 불리했다. 그가 보석상에서 도난 당한 물건 일부를 전당포에 맡긴 사실이 드러났다. 피해자의 사정을 잘 아는 정원사였고, 또 흑인이었다. 범인이 왼손잡이일 것이라는 감식 결과가 있었고, 공교롭게 포드가 왼손잡이였다. 또 그에겐 마약 문제로 경찰서를 오간 이력이 있었다. 범행 시점 현장 주변에서 포드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다른 용의자의 여자친구가 한 증언이었지만, 이미 심증을 굳힌 경찰은 그 흠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물론 포드는 결백을 주장했다. 전당포에 맡긴 건 평소 친분이 있던 나머지 용의자들에게서 선의로 얻은 물건이었고, 장물인 줄도 몰랐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검찰은 84년 12월 5일, 포드와 나머지 용의자들을 1급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당시 주검찰청 수석검사가 스트라우드였다.
포드에게는 2명의 국선 변호인이 배정됐다. 형사사건을 맡은 적도 없고 배심원 재판에 참여해본 적도 없는 초임 변호사들이었다. 그들은 알리바이와 증언의 진위를 확인해달라는 포드의 요구를 묵살했다. 주 정부로부터 그들이 받은 일당 3달러로는 조사 경비를 댈 수 없었다는 게 이유였는데, 재판을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해 보충 조사를 벌이는 데 들인 경비는 별도로 법원에 청구할 수 있다는 규정조차 몰랐던 건 먼 훗날 밝혀진 사실이었다. 재판은 포드에게 너무 불리해서 배심원 12명 전원이 백인이었다는 점조차 오히려 사소한 문제로 보일 정도였다. 법원은 2개월 뒤 포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배심원단은 나머지 세 피고에 대해서는 무죄를 평결했다.
글렌 포드는 1949년 10월 22일 슈리브포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사해 거기서 고등학교(11학년 중퇴)를 다녔고, 미용학교에 등록해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사건 몇 해 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때그때 식당 일등 이런저런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뒷골목 친구들이 선심 쓰듯 건네 준 금붙이는 그로선 횡재였고, 그게 어디서 나온 물건인지 따져 물을 만큼 그가 윤리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포드는 루이지애나 주 중죄인교도소 가운데 수형 여건이 최악이라 알려진 앙골라 교도소 0.8평 사형수 독방에 수감됐다. 거의 매년 검찰과 주정부에 재조사를 청원했지만 거부당했다. 억울한 사형수 등 수감자를 구제해온 인권단체 ‘IP(Innocent Project)’가 2007년 포드 재판의 문제점들, 특히 유죄 입증의 결정적 변수였던 증언이 “근거도 없고 신뢰하기도 힘들다”는 주장을 제기했지만, 주 법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2012년 카도 패리시(Caddo Parish) 지방검사 데일 폭스는 다른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중 정보원으로부터 83년 로즈먼 살인사건의 주범이 재판 과정에 무죄로 풀려난 셋 중 둘이고, 포드는 살인에 관한 한 아무 관련이 없다는 진술을 듣게 된다. 재수사 결과 그 진술은 사실로 확인된다. 폭스는 그 해 6월 ‘무죄 증거’와 함께 연방법원에 그의 재심을 청구한다. 그 무렵 진범들은 다른 사건으로 형을 살고 있었다. 다시 말해 검찰이 엉뚱한 사람을 가두고 진범을 풀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범행을 저지르게 한 거였다. 검찰 스스로 조직의 엄청난 과실을 자백한 셈이었다.
2014년 3월 11일 연방법원은 원심 판결을 무효화했고, 포드는 당일 석방됐다. 구속된 지 29년 3개월 5일 만이었다. 자유인이 된 64세의 그에겐 교도소 측이 교통비 명목으로 지급한 20달러짜리 직불카드 한 장과 교도소 노역 통장에 든 4센트뿐이었다.
석방된 뒤 수많은 보도진을 벗어나자마자 포드가 IP 변호사에게 맨 처음 한 말은 “배가 고프다”는 거였다고 한다. 사형수가 아니게 된 순간부터 사형수로서 먹던 음식을 일체 거부했다는 게 포드의 설명이었다. 뉴올리언스의 출소자 재활시설로 이동하던 61번 고속도로에 단 하나 있던 레스토랑이 하필 그날 쉬는 날이더라는 이야기, 차를 돌려 주유소 간이매점에 프라이드 치킨과 도넛을 주문하러 갈 때 포드는 차 안에 머물렀다는 이야기(30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직접 문을 열고 나서본 적이 없어서였다. The Atlantic, 2014.3.14), 그리고 두 달 뒤 폐암 말기(4기) 진단과 함께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는, 너무 소설 같아 소설이 되지 못할 이야기.
그의 불운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루이지애나 주법에 따르면 무고한 형기에 대한 정부 보상금은 연 1만 달러에 최고 25만 달러. 거기에 ‘잃어버린 삶(loss of life)’에 대한 별도의 위로금이 8만 달러다. IP의 포드 담당 변호사 게리 클레멘츠(Gery Clements)는 주정부에 그 돈을 청구한다. 하지만 카도 패리시 검찰청은 포드의 장물 처분 사실을 들어 ‘무고한 피의자에 한해 지급한다’는 배상 규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집행을 거부했고, 2015년 3월 법원 역시 “포드의 손에 피가 묻지는 않았지만, 그의 손이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며 검찰 편을 든다. 판결 직후 클레멘트는 “법원의 결정은 범죄가 일어난 집 앞 길을 무단 횡단했다고 보상을 거부한 것과 같다. 그가 장물을 전당포에 맡긴 혐의로 기소됐다면 사형 선고를 받고 30년이나 옥살이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IP 뉴올리언스 지부는 성명에서 “이 판결은 지난 30년간 포드가 감당해야 했던 일련의 가혹한 불의들 중 가장 마지막 불의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허핑턴포스트, 2015.4.3) 포드는 숨을 거둘 때까지 생활비와 치료비 일체를 봉사단체의 도움과 시민 성금으로 충당해야 했다. 주 정부를 상대로 한 인권 침해 등에 대한 소송 역시 그의 죽음으로 중단됐다.
그를 기소했던 당시 지방검찰청 수석검사 스트라우드는 법원의 배상불가 판결 직후 지역 신문인 ‘슈리브포트 타임스’에 장문의 글(shreveporttimes.com, 2015.3.20)을 기고했다. 법원 결정을 비판하는 신문 사설에 동조하며 거기 얽힌 자신의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힌 그 글의 첫 머리에 스트라우드는 “제도의 허점이 그의 삶을 철저하게(effectively) 파괴한 만큼 주 정부는 그 어떤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에게 최대한의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그가 겪게 한 고통에 대한 배상을 정의의 이름으로 회피하려는 주정부의 뻔뻔스러운 노력에 소름이 돋는다”고 썼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실수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사죄의 문장이 이어졌다. “이 사건은 사형의 자의성(arbitrariness)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이제서야 나는, 33살의 젊은 검사였던 내게 다른 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스트라우드는 자신이 글렌 포드의 재판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지켜봤고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 마침내 정의가 실현됐노라 믿었다고, 마땅히 할 일을 해낸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그날 밤 동료 검사들과 몇 번씩 자리를 옮겨가며 축배의 술을 마셨다고, 피해자 가족들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오만했고, 심판하는 일을 좋아했고, 스스로에게 도취돼 있었고, 또 자신만만했다. 나는 정의 그 자체보다 내가 이기는 것에 더 몰두했다.(…) 바로 나 자신이 모든 걸 망쳤다. 지금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를 위해 이 말을 한다. 내가 촉발한 글렌 포드의 모든 비참에 대해 그와 그의 가족에게 사죄한다. 그릇된 판단으로 헛된 결말을 안겨준 로즈먼씨의 유족에게도 사죄한다. 배심원들에게 마땅히 제공했어야 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사죄한다. 내 의무를 다하지 못함으로써 오점을 남긴 재판부에도 사죄한다.”그리고 덧붙였다. “우리 스스로가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공정하고 공평하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완벽한 제도를 만들 수 없다.”
스트라우드는 처절한 반성과 백 마디 사죄의 말보다, 또 그 어떤 금전적 보상보다, 포드의 억울한 희생을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그가 행할 수 있는 진정한 반성과 사죄의 길이라 여겼고, 그것이 사형제 폐지였다. 그가 자신의 사죄를 글렌 포드 개인에게 말이나 편지로 전한 게 아니라 언론 즉 지역 공동체와 미국 시민에게 한 까닭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름 없는 신문에 실린 그의 사과문은 주 경계를 넘어 미국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난 4월 그는 병석의 글렌 포드를 찾아가 머리를 숙였다. ABC ‘나이트라인’을 통해 방영된 그 방문에서 스트라우드는 “내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며, 무덤에 갈 때까지 그 오점이 씻기지 않을 것임을 안다”며 포드에게 머리를 숙였다. 일어설 힘이 없어 앉아서 그와 악수를 나눈 포드는 “하지만 옥살이가 끝이 아니었다”고 “지금 내게는 6~8개월의 시한부 선고가 내려져 있다”고 말한 뒤 어렵사리 진심을 털어놨다. “미안합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정말 못하겠어요. 정말요.(I’m sorry. I can’t forgive you. I really am. I really am.)”
스트라우드가 포드의 용서를 기대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자신의 반성문 끝을 이렇게 맺었다. “나는 내가 글렌 포드에게 보여준 것보다는 많은 자비가 신의 뜻 안에 있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맺는다. 하지만 내게 그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도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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