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시설 마련 후 대부분 방치
작업장ㆍ노인정 등 문 잠겨있고
임대주택은 거의 독거가구용
쪽방촌 체험 관광사업화 구상
"가난한 삶 상품거리로 만드나"
전셋돈마저 없는 사람들은 괭이부리말 구석에 손바닥만한 빈 땅이라도 있으면 미군 부대에서 나온 루핑이라는 종이와 판자를 가지고 손수 집을 지었다. 집 지을 땅이 없으면 시궁창 위에도 다락집을 짓고, 기찻길 바로 옆에도 집을 지었다. 그리고 한 뼘이라도 방을 더 늘리려고 길은 사람들이 겨우 다닐 만큼만 내었다. 그래서 괭이부리말 골목은 거미줄처럼 가늘게 엉킨 실골목이 되었다. 이렇게 괭이부리말은 어디선가 떠밀려 온 사람들의 마을이 되었다. 오게 된 까닭은 모두 달랐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 보금자리를 만들어갔다. 세월이 가고, 남보다 열심히 일하거나 운이 좋은 사람들은 돈을 모아 괭이부리말을 떠났다. 괭이부리말에 남은 이들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김중미 ‘괭이부리말 아이들’중에서
판자촌 아이들의 방황과 성장을 감동적으로 담아내 2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무대 인천 만석동 9번지. 작가 김중미(52)씨가 적확하게 표현한 실골목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가스통이며, 집에 들여놓기엔 부담스럽게 큰 고무대야 등 살림살이들로 아이 두 명이 함께는 지나다니지 못할 만큼 여전히 비좁았다. 359세대 616명이 사는 이 곳에 쪽방 거주자는 230세대 300명 가량으로, 상당수는 여전히 마을의 공동화장실 네 곳을 이용한다. 집들은 옆으로, 위로 다닥다닥 겹쳐 지어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얼기설기 얹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거미줄처럼 엉킨 전깃줄이 늘어져 있고 처마 밑에는 연탄더미가 높이 쌓여 있다. 골목 안 풍경은 그대로지만,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연결하는 도로 주변은 쪽방 지원센터와 자활공동작업장이 들어선 4층 건물이 우뚝 서 있는 등 개벽했다. 아랫동네에는 두산인프라코어가 지어 기부한 김치공장도 있다. 겉보기에 번듯한 조망을 갖게 됐지만 정작 쪽방 밀집지에는 아직도 큰 비가 올까 두려운 집이 많다. 언덕바지 위로 너른 터가 있어 마을 아이들이 모여 놀던 윗동네는 사람들이 떠나 빈집이 30~40곳이나 된다고 한다.
▦마찰 빚는 관광지 구상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괭이부리마을은 지금 도시재생 사업의 몸살을 앓고 있다. 따지고 보면 주민의견수렴 부족을 이유로 구 의회가 무산시킨 ‘옛 생활체험관’ 건립 논란도 그 일부분이다. 동구청의 도시재생 계획인 관광벨트화 구상의 주요 시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흑백TV와 요강, 다듬이 등 옛날 물건들을 채워 넣고, 부모와 아이가 1만원으로 하룻밤 자고 갈 수 있는 공간으로 꾸밀 계획이었다. 동네 토박이인 장명주(57)씨는 “염장을 질러도 유분수지, 뭐 볼게 있다고 체험마을을 만들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부방 상근교사이자 만석동 주민인 임종연(45)씨는 “체험관 때문에 주민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부산 감천마을이나 고양시 프로방스마을을 본보기로, 괭이부리마을을 관광코스로 만들고 게스트하우스를 설치한다는 계획은 원래 전임 구청장 때부터 있었지만 주민 반발이 심해 보류상태로 있었다. 그러다 괭이부리마을 관리가 인천 동구청 도시재생과에서 올 초 신설된 관광개발과로 이전되면서 관광화 사업이 급물살을 탔다. 구청에서는 배다리마을과 만석부두까지 이어지는 관광코스에서 숙소 지역으로 괭이부리마을을 낙점했다. 전국적 유명세를 탄 괭이부리마을의 빈집을 손 봐 숙소로 만들자는 속내다.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의 인기 이후 재조명된 2013년 구로단지에 들어선 노동자생활체험관이 모델이 됐다. 하지만 관광지가 아닐뿐더러 생업은 따로 있어 사람들이 이 마을을 많이 찾는다고 해서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주민들의 반대 입장이다. 동구청 관계자는 “동구 관내에만 빈집이 670곳이나 되는데 폐ㆍ공가를 방치할 수 없으니 주인 허락을 구해 예술가들에게 공방으로 임대를 주거나 게스트하우스로 이용하자는 취지였는데 주민들이 사사건건 반대하니 당분간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도시재생을 관할하는 중앙부처 관계자는 “구청이 예산을 따내기 위해 등 열심히 뛰었지만 과욕이 부른 참사”라고 평가했다.
▦곳곳에서 빼걱거리는 마을 재생사업
사실 도시재생 취지는 물론이고 시작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2011년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시작되면서 지역주민들과 도시전문가, 관이 의견을 모아 원주민들이 정착해 살 수 있는 마을로 꾸미기로 했다. 국비와 지방비 등 53억원 규모의 대공사에 당시 1기 주민협의체가 구성됐으나 구청 주도로 윗마을 일부를 밀고 임대아파트와 문학관, 카페 등을 짓는 과정에 언성이 높아졌다. 주민들은 낡은 판잣집들을 고칠 수 있도록 융자를 해주고, 폐ㆍ공가 부지에 임대주택을 짓는 식의 순환재개발로 공동체가 살아남는 재개발을 원했다. 이런 마찰 등으로 인해 동구청이 전국 최초의 원주민 재정착 및 주민소득 증대를 위한 혼합형 주거지 재생 모델의 핵심사업이라는 임대아파트(98세대)도 결국 장애인, 생활보호대상자 등 월세 보조가 되는 소수만 입주했다. 보증금에 월세까지 내야 하는 판국이라 임대주택 대상지 거주 44세대 중 28세대 정도가 들어가기로 예정돼 있었지만 입주포기자가 속출한 것이다. 장명주씨는 “아파트라 봐야 방 한 칸이다. 다 큰 아들 딸 데리고 함께 잘 수도 없는 걸, 쓰러져가는 집이라도 내 집이 있는데 다달이 돈을 내며 들어가서 살 일이냐”고 했다. 아파트는 대부분 독거가구를 위한 평수 위주다. 1기 협의체에 참여했던 한 주민은 “구청이 계획을 다 짜놓고 주민은 들러리만 서는 꼴이라 나왔다”고 말했다. 지난 3월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 인사들이 현장 확인 차 왔다가 피켓시위가 벌어져 주민과 지자체 간 갈등만 확인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주거환경 개선사업 대상 전체 면적 2만㎡의 10% 정도에 노인정, 공동창고, (굴 까는)공동작업장, 공방 등 공동시설물 12곳이 들어섰지만 대부분 사용되지 않은 채 잠겨 있는 등 삐걱대는 게 한 둘이 아니다. 화분형 텃밭만 해도 수도료 때문에 잠가 놓아 주민들은 작물에 물을 대기 위해 집에서 직접 떠온다. 주민 유동훈(47)씨는 “맞벽으로 된 집들이라 우리집을 꾸미려면 옆집 벽을 허물어야 하고, 지붕도 이어져 있어 손 댈 수 없는 처지인데 이런걸 내버려 두고 공중화장실 외관을 대리석으로 꾸미는 보여주기 행정만 하고 있어 주민들이 부글부글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기웅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 연구교수는 “브라질의 빈민촌 체험 상품인 파벨라 투어도 주민 동의를 구해 관광화하면서 주민과 수익을 나누고, 보여줄 수 있는 것과 사진 찍는 장소를 한정하고 있다”며 “괭이부리마을의 경우 관광 수입이 될만한 토대도 빈약하고 주민도 반대하는데 관청이 지역발전 계획의 하나로 덮어씌운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채지은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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