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주몽의 나라’ 판권면을 열어 발행일(2006년 7월 20일)을 확인하자니 가슴이 왈칵한다. 이 책의 대본인 이규보의 한문 서사시 ‘동명왕편’을 작가와 함께 읽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고전이 그저 오래된 책, 꼭 읽으라고 하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이 되지 않으려면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획한 ‘샘깊은오늘고전’ 시리즈. 그 첫걸음을 뗐던 날들의 소회가.
조호상 작가와 내리 닷새에 걸쳐 ‘동명왕편’을 읽은 때가, 책 나오기 1년 전 옥수수가 한 길쯤 자란 여름이었다. 주몽 이야기를 조호상 판으로 새로 써보자는 제안을 하니, 처음에는 심드렁하던 작가. 그런데 고전문학을 전공한 책임 편집자가 원전 강독을 맡겠다, ‘동명왕편’의 말맛과 세부와 수사를 작가가 충분히 호흡해낸 작품을 원한다, 하니 반색을 했다. 2005년 7월 드디어 강독을 시작하고 미진한 데는 그 달 말까지 두 번, 세 번 되짚어 읽으며 완독했다. 이 강독을 한여름 서울 하늘 아래 비좁은 사무실이나 다방에서 하기는 정말 싫었는데 이 또한 ‘때마침!’ 이규보가 알아주었는지, 설마 주몽이 알아주었는지, 지인이 용인시 어느 곳 농지 한가운데 자리한 집 한 칸을 내주었다.
서울에서 용인 어느 골 간다는 버스를 타고 내리면 난개발 속에 간신히 살아남은 남새밭이 나온다. 남새밭 지나면 휴경에 들어간 묵정밭, 거길 지나면 여름에 옥수수가 한 길이나 자라 병정처럼 서 있는 옥수수밭이 나왔다. 그 옥수수밭 북쪽 끝에 여름 임시 강당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내 둘이 앉아 옛 시인의 서사시를 읽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며 ‘위서’가 이른 시기에 주몽 이야기를 담았다. 고구려 기록으로는 ‘광개토왕릉비문’며 ‘모두루묘지’에 나온다. 고려시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또한 이 이야기를 전한다. 단 이들 기록은 줄거리는 담았으되 세부가 많이 모자란다. 주몽의 아비 해모수가 술을 빌미로 주몽의 어미 유화를 유혹하는 장면, 해모수와 주몽의 외할아버지인 하백이 각각 수달-사냥매-승냥이-잉어-꿩-사슴으로 변해 서로 쫓고 쫓기는 장면, 헤라클레스 이야기만큼이나 구체적 시련과 극복으로 짜임새를 갖춘 주몽의 성장과 부여 탈출 장면, 건국을 위해 평원의 흰 사슴을 몽둥이질해 그 울음소리를 하늘에 울려 퍼지게 한 야만에 가까운 야성과 간계들은 다른 데는 없다. 오로지 약 800년 전, 이 작품을 쓸 때 스물여섯이었던 고려 시인 이규보의 서사시 ‘동명왕편’에만 남은 이야기다.
강독의 한 고비를 지나면 당연히 술 한 잔씩을 나누었다. ‘동명왕편’은 한 구 한 구의 속도가 빠르고, 장면 집중도가 높은 서사시다. 읽는 이로 하여금 몰입하게 하는 힘이 각별하다. 엉뚱한 몰입, 옥수수밭에서 나는 쏴아쏴아 소리를 들으며 화주를 넘기다, 두 사내는 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저마다의 유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에 지피기도 했다. 왕조 개창자의 간지와 힘보다, 사내들은 유화가 그리웠다. 기획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는 정념에 지핀 작품 생산 과정이 여름날 밤하늘 아래 그렇게 흘러갔다.
고동균·알마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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