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반(反)사실시대의 지성

입력
2015.07.29 15:58
0 0

얼마 전 강준만은 ‘정치 혐오’라는 주제로 정당과 정치 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그가 인간에 대한 간명한 가정을 통해 논지를 풀어내는 방식이었다. 사실 모든 사회이론의 시작은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 글에서 강준만이 전제하는 인간은 이기적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이기적으로 합리적이다. 이타적 이상을 추구하는 정치인조차 자신의 이상을 추구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이기적으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따라서 막말과 배신의 퍼레이드를 통해 정치에 대한 혐오를 자극하는 건 매우 합리적이다. 잠재적 경쟁자들이 정치에 진입하는 걸 막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 개혁이란 이기심에 의해 죽어가는 정치적 자유 경쟁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당 내 ‘시장 기능’이 마비되면 정치도 사라질 것이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엔 권력이 자라난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는 정치, 사회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눈 여겨 봤을 책이다. 출판 이듬해인 1933년 이 책에 대한 서평들이 쏟아진 건, 당시 세계적으로 정치와 대중, 리더십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관심이 비등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주축국’(Axis) 연맹이, 훗날 ‘연합국’(Allies)을 구성한 민주주의 진영에 당당하게 체제 경쟁을 선언하던 때였다.

니버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관찰들을 동원해,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으나 집단은 도덕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영구평화론이나 박애 같은 독일 철학과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이상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신학자인 그가 보기에도 국가가 ‘그리스도의 법’을 따를 것이라 기대하는 건 너무 순진하다. 그 기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에 의해 무너진지 오래다. 결국 인간이 집단적, 사회적 문제를 풀기 위해 사용해온 건 윤리와 양식이 아니라 강압과 갈등으로 점철된 ‘정치’였다.

니버의 시각에서 본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 혐오는 정치의 강압적 권력화를 가리키는 징후이기도 하다. 정치 혐오가 만연하면, 권력에 대한 정당한 물음을 억누르는 것도 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민주화를 이룬 줄 알았다. 그런데 정당한 질문들이 불온시되고, 대답을 거부하는 게 정당화되는 일이 점점 더 자주 벌어지고 있다.

1974년 한 젊은 정치학자가 ‘반정치시대의 진실과 허위’라는 글을 썼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억압적 정치가 나타나는 이유를 정치 권력의 관료화에서 찾는다. 정치 권력이 나라의 ‘관리’에 치중하게 되면 이를 강제적으로 달성하려는 동기를 갖게 된다. 억압적 기제들이 정치를 대신하게 되고 이는 국민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가치가 증발한 자리를 차지한 과잉 권력은 부정부패의 온상이자, 국가실패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대한 해답을 어떤 폭력적 권력도 ‘한 시대의 모든 사람과 모든 기록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믿음에서 찾았다. 여기에 ‘지성’의 정치적 역할이 있다. ‘사실을 밝히고 사실관계를 해명’해주는 지성의 자유가 ‘법적, 정치적 제도에 의해 보장’된다면 정치는 살아나고, 웃자란 권력도 제어될 것이다. 그는 이 자유로운 지성의 예를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찾았다. 지성의 정치적 역할이란 사실이 정치적 프레임의 노예가 되기 전에 그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집단 공동체로서 국가의 실패를 막고 국민이 정치의 혜택을 받도록 해주는 첩경이다.

이 젊은 정치학자는 훗날 마지막 군사정권의 총리가 됐다. 정권이 바뀌고 난 뒤 대통령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제기하며 보수 진영의 중심 인물로 살았다. 지금도 검색하면 나오는 그의 칼럼들에는 과도한 행정부 권력 때문에 벌어지는 전횡과 부정부패에 대한 사실들이 적시돼 있다. 하지만 그 이전의 더 참혹했던 사실들이 함께 고려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사실이 수모를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성이라 불릴만한 이들의 대부분은 정파적 프레임이라는 자장에 갇혀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택하는 중도의 길이란, 사실상 구체성이 결여된 사실만을 말하겠다는 뜻이다. 한때 자유로운 지성을 갈망했던 전직 총리를 보면서, 개인적 삶의 궤적 또한 자유로운 지성의 조건임을 느끼게 된다. 당장 그렇게 살지 않을 용기가 없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