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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세상’이 있는 곳

입력
2015.07.2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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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친구들을 만나도 할 말이 없다. 내가 말하자 G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쳐 녀석이 다니는 회사의 갑작스러운 조직 개편과 불합리한 업무 분장과 살인적인 업무 강도와 재수 없는 팀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이라서 더 그랬던 것도 같다. G는 내게 자세가 안 되어 있다며 그래 가지고 글은 어떻게 쓰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할 말이 없다, 라고 쓴다고 말했다. 다만 그 말을 조금 길게 쓸 뿐이다. G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을 똑바로 볼 필요가 있다. G가 말했다. 네가 보는 세상은 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내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고, 아마 책인 거 같다고 대답했다. 아니, 트위터인가? 그러자 G는 “하!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표정으로 내게 일장연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건 세상이 아니다, 세상은 활자 바깥에 있는 것이다, 글을 쓰고 싶어 하던 친구들(우리는 국문과를 졸업했다)을 떠올려봐라, 비록 현실의 무게가 그들을 포기하게 만들었지만 그들의 마음만은 진짜였다, 지금 너는 진짜인가, 그들이 처한 현실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너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해보기로 한다.

평일의 PC방은 의외로 붐볐다. 하지만 B는 여전히 앓는 소리를 했다. 월세에 아르바이트 월급에 컴퓨터 업그레이드 비용까지. 정작 자기가 가져가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인수와 인테리어를 위해 빌린 돈은 이자만 겨우 갚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정치학을 전공한 B는 이미 당구장과 식당을 통해 두 차례의 실패를 경험했다.

“요즘엔 때 되면 통장에 꼬박꼬박 월급 들어오는 직장인 제일 부럽다.” 그건 바로 J였다. IT 회사에서 시스템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J의 전공은 사회학이었다. 짧지만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인문계형 인간이었던 J가 개발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 월급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곧 태어날 아이가 있었고 신문사 월급으로는 도무지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J는 6개월짜리 과정을 이수했고 비전공자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며 아이가 일곱 살이 되고 그 아이의 동생이 세 살이 된 지금까지 회사를 다니고 있다. 모르긴 해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하지 않았을 거다. 그것이 J가 종종 부인 몰래 연차를 내고 B의 PC방을 찾는 이유였다. J는 말한다. “그래도 너는 글을 쓰잖아. 직장이야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거고. 나는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낫다고 생각한다.” J가 말하는 ‘우리’는 나와 J와 B와 K. 근 20년을 함께 놀아온 동네친구들이다.

K는 저녁에 합류했다.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경찰공무원 준비를 하기도 했던 K는 어느 유명 학원에서 강의를 촬영해 동영상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보안 업체에서 일반 사무직으로, 방송국에서 학원으로…. K는 일곱 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나는 그게 부러웠다. 쉽게 문을 두드리고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것. 그건 내가 갖지 못한 많은 능력 중의 하나였다. “이제 슬슬 옮길 때가 된 거 아니야?” J가 물었고 “이젠 사업을 해야지. 남 밑에서 아무리 굴러봤자 별 볼일 없다. 길게 봐야지.” K가 대답했다. 요즘 녀석이 부러워하는 건 다름 아닌 B였다.

그러고 보니 술자리가 파할 무렵 G도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매달 어떻게든 숫자(매출)를 맞추는 게 너무 힘이 든다고, 가끔은 네가 부럽기도 하다고. 그렇다면 녀석이 말한 세상이란 숫자 속에 있는 걸까? 나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런 건 묻지 않는 게 좋다. 다만 이 글을 보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내가 부러울는지는 조금 궁금하다.

금정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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