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매주 화요일 아침 마다 입가의 주름살이 몇 겹씩 늘고 있다. 10시부터 다섯 명의 어린(?)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드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는 탓이다. 실제 웃겨서이기도 하고 가슴이 슬며시 달아오를 만큼 그저 느낌이 ‘좋아서’ 그렇기도 하다. 20대 중후반의 성인이지만 10살 아래위 정도의 맑고 투명한 의식세계를 지닌 이들은, 이른바 ‘발달장애인’들이다.
사전적 정의로 ‘발달은, 성장에 따른 발전 과정으로서 대개 일정하고 예측 가능한 양상으로 진행되는 역동적 과정을 뜻하는데 발달 장애란 어느 특정 질환 또는 장애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해당하는 나이에 이루어져야 할 발달이 성취되지 않은 상태’라고 알려져 있다. 보통 정신지체나 뇌성마비, 자폐성 장애 등이 그 영역 안에 들어간다. 어느 정도 육체적 성장을 마쳤지만 정신적 성장의 흐름을 거의 멈춘 채 계속 어린 ‘아이’의 감정과 시선으로 세상과 마주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발달장애인’이라는 학술적 용어 대신 이들을 ‘청년 아이’라고 부른다. 어른의 몸을 지녔을 뿐 몸을 지배하는 의식이 ‘아이’인 이들을 ‘장애’라는 관계망으로 구분을 두어 살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친구들은 언어 사용이나 사람과의 관계 등에 어려움이 있고 사물이나 어떤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대응에도 분명 불편함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아이들이 느낄 생활의 ‘불편함’보다는 이 아이들을 포함한 ‘장애인’을 충분히 배려하고 살피지 못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더 불편하기만 하고 그들을 향한 뒤틀린 시민의식에서 나오는 불평등한 시선에 더 큰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 자체가 그닥 편하지는 않다. ‘장애’를 인간이라는 ‘완성체’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모자람이 많은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하고 ‘구분’ 짓게 하는 기준점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단지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일 뿐이지 않은가. 하긴 타인의 삶의 ‘층위’를 결정지어 버리는 존엄성에 기반 하지 못한 용어들이 도처에 숱하게 깔려있기는 하다.
나는 사진심리상담사로서 꽤 오랜 기간 여러 형태의 불편한 증상을 지녔거나 마음에 멍이 든 이들과 긴 인연을 맺어 오고 있다. ‘사진행위’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과 교감을 이루면서 스스로 자신의 성장과 회복의 눈을 뜰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역할이다. 더디거나 당장의 효과가 없다 한들 어떠한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내적인 감정과 맞닿는 행위로 조금씩 눈이 트여가는 것만으로도 우선 충분하다.
매주 화요일 마다 다운증후군을 지닌 한 친구를 포함한 다섯 명의 ‘청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세상과 마주하는 눈, 사진’이다. ‘대면의 도구’인 카메라를 들고 세상풍경과 마주하는 중인 이 아이들과 모두 8주의 전체 기간 중 이미 네 번의 ‘눈빛 나눔’ 시간을 보냈다. 어제 창경궁 나들이에 나선 ‘혜원이, 하은이, 영재, 예은이, 건우’는 한여름 삼복더위의 후끈한 기운 아래 꽃과 나무들, 풀잎과 돌조각들 그리고 음료수 자판기를 비롯해 늙거나 젊은 사람들 등과 마주하면서 다시 웃고 떠들었다. 하루의 마지막 순서로 써보는 사진일지를 들어 보이며 ‘하은이’가 활짝 웃은 얼굴로 어눌하지만 분명한 감정을 담아 자신의 글을 읽었다. 모두 박장대소 할 수밖에! “7월 28일. 오늘 나는 사진을 무려 10장이나 찍었다. 무척 더워서 나는 오징어 통구이가 될 뻔 했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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