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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칼럼] '인분 교수', '미생공화국'의 자화상

입력
2015.07.2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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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교수가 자신의 제자에게 인분까지 먹이며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폭력을 행사했다. 가히 ‘세계적’ 이슈가 될 만한 이 사건은 소위 ‘인분 교수’와 그의 측근들을 ‘악마화’하는 것만으로는 해명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폭력적 인권침해의 현실을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것’은 언제나 ‘사회정치적’이다. 개인에게 일어난 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의 제도들, 가치 체제들, 그리고 권력 구조들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미시적으로 보자면 ‘악마적’인 개인이 자신의 직책과 권력을 악용하여 저지른 개인적 사건이지만, 거시적으로 보자면 다른 일련의 폭력적 인권침해 사건들과 유사한 논리와 가치 체제에 연결된 사회정치적 사건이다. ‘인분교수’ 사건에는 커다랗게 여섯 집단이 연계되어 있다. 교수, 보조자들, 교수가 속한 대학, 소속된 종교, 그를 회장으로 또는 자문위원으로 만든 단체와 정당, 그리고 사건의 피해자이다.

왜 소위 ‘인분 교수’는 이러한 ‘악’적인 일을 하게 되었을까. 왜 그 ‘보조자들’은 이 ‘악’에 가담함으로써 ‘가해자’가 되었을까. 또한 이 피해자 제자는 2년이라는 기간 동안 갖가지 모욕과 폭력을 견디고자 했을까. 왜 그 교수가 속한 대학에서는 교수가 ‘절대적 가해자’가 되는 것을 감독하고 차단하는 제도적 장치가 작동되지 않았을까. 왜 그가 속한 종교는 다른 인간을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종교적 가르침조차 그에게 자각시키지 못했을까. 정당과 단체들은 어떤 기준들을 가지고 그에게 갖가지 상과 직책들을 부여한 것일까. 이러한 일련의 물음들은 이 ‘인분 교수’ 사건이 가능하게 된 연결고리가 매우 복합적이고 광범위하게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한 사회에서 ‘비판적 지성’과 ‘양심’의 역할을 해야 하는 대학은 어떤가. 운전 능력과 상관없이 운전사가 대동되는 차를 타고 다니는 대학총장들은 교수들 ‘위에’ 군림하면서 ‘완생-갑’으로서의 막강한 위계적 권력을 행사한다. 교수들간에도 직책과 연륜에 의한 위계주의, 학생들간에도 선배-후배, 남성-여성 등 다양한 요소들에 의하여 작동되는 위계주의들은 권력 악용의 공간들을 끊임없이 지속시키면서 다양한 ‘미생’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른바 '인분 교수'의 지시를 받은 다른 제자가 피해자의 얼굴을 손으로 때리는 장면. 교수와 범행에 가담한 제자들은 피해자를 폭행하는 모습을 인터넷방송인 아프리카 TV 비공개방에서 실시간 생중계를 하며 공유했다. 성남중원서 제공
이른바 '인분 교수'의 지시를 받은 다른 제자가 피해자의 얼굴을 손으로 때리는 장면. 교수와 범행에 가담한 제자들은 피해자를 폭행하는 모습을 인터넷방송인 아프리카 TV 비공개방에서 실시간 생중계를 하며 공유했다. 성남중원서 제공

초중고등학교들에서는 교사가 학생에게, 선배 학생은 후배 학생에게, 그리고 힘센 학생은 힘없는 학생에게 갖가지 폭력과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다. 보육원에서는 육체적 권력을 지닌 보모가 ‘절대적 약자’인 아이들에게 갖가지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군대에서도 육체적, 심리적, 언어적, 성적 폭력으로 인한 ‘폭력의 일상화’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종교단체, 사회운동단체, 방송계도 예외는 아니다. 직책, 연배나 나이, 성별, 학력 등에 따른 직책차별주의, 나이차별주의, 성차별주의, 학력차별주의라는 폭력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왜 대한민국에서는 이렇게 개별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직책, 성별,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약자’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인가. 왜 한편에서 ‘미생’ 취급을 받는 ‘피해자’들이, 다른 편에서는 ‘가해자’들이 되고 있는가. 왜 이러한 ‘폭력의 사슬’을 제재하고 감시하는 ‘제도적 장치’들은 작동되지 않는 것인가. ‘절대적 약자’가 되어 버리는 가장 하위의 ‘미생’들은, 단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인권이 무엇인지조차 묻지 못하는 ‘절대적 희생자’들이 되어 버린다. ‘인분 교수’ 사건을 단지 특정한 개인들의 문제로만 보는 것의 결정적 문제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누가 ‘미생’이고 ‘완생’인가.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정규직을 가졌을 때 그는 자동적으로 ‘완생’이 되는 것일까.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생(未生)’과 ‘완생(完生)’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재규정해야 한다. ‘미생’은 단지 비정규직에 있는 사람이고, ‘완생’은 정규직이라고 보는 단순한 이해는, 지금도 대한민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인권침해의 정황들을 해명하지 못한다. ‘완생-갑(甲)’과 ‘미생-을(乙)’은 고착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거시공간에서의 갑과 을, 그리고 미시공간들에서의 갑과 을들이 존재할 뿐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서로의 ‘완생’됨을 부정하면서 ‘미생’들을 만들어내는 ‘생산라인’에 서 있다. 이제 ‘미생’과 ‘완생’의 근원적인 재개념화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모든 사람은 나이, 직책, 성별, 학력 등에 상관없이 ‘완결-생명 (완생)’이다. 그 누구도 ‘미완결-생명 (미생)’으로 취급 받아서는 안 된다.

‘인분교수’ 사건은 대한민국의 두 가지 치부를 드러낸다. 첫째, ‘위계적 폭력성’과 ‘인권침해적 비민주성’ 의 일상화가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이라는 점이다. 둘째,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이들을 ‘미생’으로 취급하는 폭력들을 엄격히 제재하는 제도적 장치가 대한민국 전반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절대적 약자’들로서의 ‘미생’들이 곳곳에서 양산되고 있는 ‘미생공화국’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절망만할 수는 없다. ‘인분 교수’사건은 곳곳에서 다양한 옷을 입고 자행되는 ‘폭력과 인권침해의 사슬’을 어떻게 끊어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찰, 그리고 이에 따른 제도적 장치들을 모색해야 한다는 긴급한 과제 앞에 우리 모두를 ‘소환’ 하고 있다. 이 ‘소환’을 통해서 개인들은 ‘인권’에 대한 예민성을 기를 수 있는 성찰을, 그리고 그 개인들이 몸담고 있는 집단들은 이러한 ‘인분 교수’ 사건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인식론적이고 제도적인 개혁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2 또는 제3의 ‘인분 교수’ 사건은 각기 다른 옷을 입고서 지속적으로 출현할 것이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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