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프랑스 배우 뱅상 카셀과 인터뷰할 때였다. 함께 있었던 영국 기자가 대수롭지 않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최신 출연작 ‘이야기들의 이야기’를 이탈리아에서 촬영할 때 먹거리 등에 불편이 없었냐는 것이었다. 카셀은 “당신이 알 듯 이탈리아 음식은 맛이 있다. 촬영지가 영국이라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라고 답했다. 영국 기자가 바로 반박했다. “영국 음식도 맛있는데….” 배우도 지지 않고 물었다. “어떤 음식?” 두 사람 사이에 짧게 냉기가 흘렀다. 영국 기자는 쑥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피시 앤 칩스….” 카셀은 웃음을 터트렸고 재치 있는 한마디로 인터뷰를 유쾌하게 마무리했다. “너희 나라 음악은 기가 막히잖아.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나?”
영국 음식이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영국을 다녀온 사람 중에 음식에 대한 추억을 말하는 이도 드물다. 몇 년 전 베트남과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다. 일행 사이에서 뜬금없이 영국 음식 맛이 입에 올랐다. 미얀마보다 베트남에서 먹는 재미가 컸다는 게 일행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베트남과 미얀마는 국경을 맞댄 나라인데 왜 음식 맛은 차이가 클까 의문이 제기됐다. 프랑스와 영국 식민지였던 역사에서 답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지배 계층의 입맛이 음식문화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냐는 추론이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야박한 판정과 달리 영국인들의 자체 평가는 다르다. 영국 음식은 맛있다고 자찬할 뿐 아니라 영국인은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요리 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가장 즐겨보고 매일 저녁 어떤 요리를 먹을지 궁리하는 게 영국인”이라고 단언하는 한 영국인을 만난 적도 있다.
요리 용품을 팔거나 식재료를 다루는 전문점만 가봐도 영국인의 요리 사랑을 가늠할 수 있다. 영국 음식 맛이 예전보다 나아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요리를 향한 영국인들의 열정은 뜨겁다. 진지한 자세로 요리 실력을 기르려는 성실성, 이를 바탕으로 한 자긍이 영국인답다. 세계적인 스타 요리사 고든 램지와 제이미 올리버가 출연하는 여러 요리 프로그램이 영국인들의 잠들어 있던 요리 세포를 깨우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먹방’ 열풍이 안방극장을 휩쓸더니 ‘쿡방’이 유행하고 이젠 ‘집밥’ 바람이 거세다. 집밥의 아이콘이 된 백종원씨를 두고 말들도 많다. 외식 사업가의 노림수를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고, 지나치게 설탕을 많이 사용하는 백씨의 요리법은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의학적 관점의 비판도 나온다. 식당에나 적합한 백씨의 요리방식은 가정용이 아니니 진정한 ‘집밥’이 아니라는 원리주의적 해석도 있다. 타당한 의견과 비판들인데 그래도 그의 레시피로 대중은 잠시나마 조금 행복해졌다고 생각한다.
먹방이라는 유행어가 들릴 때부터 요리 프로그램이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자극하는 요리들에서 한국사회의 지독한 고독이 풍겼다. 대략 이런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원룸(고시원 좁은 방보다는 그나마 낫다)에 홀로 들어선 뒤 텔레비전을 켠다. 노동이나 공부로 녹초가 된 몸은 그럴 듯한 저녁 한 상 차릴 기운조차 없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리모컨을 누르다 보니 요리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입은 라면을, 눈은 막 요리된 볼로네제 스파게티를 각각 달리 음미한다. 한 끼를 그리 때우고 다시 화면을 보며 내일은 꼭 요리를 하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런데 누구랑 먹지?’
먹방이 집밥으로 금세 진화하는 과정에는 외로움이 에너지로 작용했다. 단순히 먹거나 요리하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감정이 집이라는 명사형 수식이 지닌 따스함에 이끌렸다. 집밥답지 않은 백씨의 집밥이 세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리라.
그래도 백씨 덕분에 앞치마를 두른 가장들이 주변에 늘었다. ‘이렇게 간단한데’라는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한번’으로 이어지고 가족을 위한 밥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집밥 열풍이 가져다 준, 그나마 긍정적인 효과라고 할까.
라제기 엔터테인먼트팀장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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