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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天食天… 인간의 생태적 삶을 꿰뚫어 본 선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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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天食天… 인간의 생태적 삶을 꿰뚫어 본 선지자

입력
2015.07.26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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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 구분은 한울님 뜻에 어긋나"

평등과 평화에 기초한 우주만물, 지배·소유 없는 평등한 관계 소망

입버릇처럼 인권을 말하지만 차별과 소외 질척한 늪은 그대로

애써 개척한 그의 길 따르지 못해

그는 현실의 질곡에 빠져 허우적대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보따리 하나를 달랑 들고 삼십 년 넘게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별명은 ‘최 보따리’가 되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ㆍ1827~1898)의 염원은 현실정치라는 피상적 수준에서의 변화가 아니었다. ‘정치가 바뀐다고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배와 종속으로 얼룩진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이다.’ 이것이 최시형의 생각이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관계의 질적 전환에 최시형의 뜻이 있었다.

동학 지도부의 심각한 노선 갈등

한 마디로 말하면 최시형은 종교적 인물이다. 정치변화와 사회구조의 변화보다는 개인의 내적 변화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진 이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의 한국사회는 외우내환의 중대한 위기상황이었고, 그래서 그가 이끌던 동학교단의 활동 역시 종교적 사명에 국한될 수가 없었다.

동학은 새로운 정치운동이자 사회운동으로서 농민들의 여망에 부응하였다. “옛 세상은 끝났다. 새 시대가 온다.” 최제우의 이러한 언명을 두고 많은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이 종교뿐만 아니라 하나의 혁신적인 정치사회운동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런 믿음이 동학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자연히 현실참여의 수위를 둘러싸고 동학 지도층 내부에는 격한 논쟁이 일어났다.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 지도부는 생존의 위협에 빠진 대다수 소농민들의 요구를 대변하였다. 그들은 하루빨리 이 땅에서 외세를 내쫓고, 외세에 아부하며 부정부패를 일삼는 기득권 세력을 혁신할 궁리를 하였다. 1892년쯤부터 전봉준은 이러한 현실참여노선을 들고 나와 최시형과 갈등을 빚었다.

그로부터 이태가 지난 1894년 전봉준은 호남의 동학농민들과 함께 사상 초유의 대규모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최시형은 격노했다. 그는 자신의 직계 제자인 전라도 부안의 대접주 김낙철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 명령을 내렸다. “전봉준은 교인의 입장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대가)접주들에게 알려 온갖 어려움이 있더라도 모두 나의 지휘를 받들며 때를 기다리게 하라.” ‘동학사’의 저자 오지영은 최시형의 성난 말투를 이렇게 적었다.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요, 동학의 난적이다.” 심지어 최시형은 충주에 주둔하는 일본군에게 전봉준의 토벌을 건의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북접 토벌되자 현실참여로 방향 전환

최시형이 옳았다든가 또는 전봉준만이 옳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들 두 사람의 첨예한 노선 갈등은 하나의 역사적 딜레마였다. 양쪽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들 각자는 종교적 성향에 차이가 있었고,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현실상황도 상이했기 때문에 양자택일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전봉준은 전라도의 비참한 농촌 현실을 대변했고, 최시형은 충청도의 지주 및 중산층의 이해를 대변했다는 주장이 있다.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최시형의 주된 활동무대가 단양과 영월 등 산간오지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주층과 인연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관군과 일제가 최시형이 직접 거느리는 북접까지 토벌 대상으로 삼자 상황이 급변하였다. 1894년 9월 최시형은 참여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인심이 천심이고, 이것이 천운이다. 도중(道衆)을 모아 전봉준과 힘을 합치라. 하여 교조(최제우)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동학의 큰 뜻을 이루자.” 이 말에서 보듯 최시형은 아마도 혼란 속에서 북접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참여를 금지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런 최시형이 마음을 바꾸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좌절하였다. 최시형은 체포령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다.

네 해 뒤 동학교도 송경인의 밀고로 그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시형은 서울로 압송되어 교수형을 받았다(1898년 음력 6월 2일).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고등재판소 판사 중에 조병갑이 끼어 있었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에 단서를 제공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19세기 조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탐관오리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이러고도 망하지 않을 방법이 있었겠는가.

만민 평등ㆍ철저한 비폭력주의

최시형은 왜 전봉준의 현실참여 노선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을까? 누군가 이렇게 캐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일차적으로는 종교철학적 문제였다고 말하고 싶다. 무장투쟁이란 애시당초 최시형에게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그는 인간의 문제를 저 깊은 심연에서 바라보았다. 그에게 인간의 생명은 지극히 소중하였다. “사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사람이 없다.”

19세기 조선은 사람을 계층, 성별, 나이에 따라 차별했다. 최시형은 이것을 인간사회의 고질병으로 인식하여 반기를 들었다. “사람은 한울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억지로 귀천을 가리는 것은 한울님 뜻에 어긋나리라.” 비폭력 노선도 강고하였다.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때리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훗날 그 가르침에 힘입어 ‘어린이날’이 제정되었다. “부인이 남편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면 정성을 다해 절하라. 온순한 말로 한 번 절하고 두 번 절하면 비록 도척 같이 나쁜 부인이라도 좋게 변하리라.” 가부장제도 아래 자행되는 가정폭력을 비판하며 그는 화순(和順)에 바탕한 부부의 평등을 강조했다.

그의 사상은 고단한 인생 역정에서 얻은 고귀한 열매였다. 남의 집 머슴살이까지 했던 최시형은 착실한 소작농이자 6년씩이나 경주 마복동의 이장을 연임했던 성실한 평민이었다. 그는 동학의 최고지도자가 된 다음에도 손을 놀리지 않았다. “한울님이 쉬지 않는데 사람이 한울님이 주는 밥을 먹으면서 손이 놀고 있으면 한울님이 노하신다.” 최시형은 자급자족적인 소규모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아 지배도 소유도 없는 인간관계의 새 출발을 소망했다.

생태적 사상 전환 이천식천(以天食天)

평생 체포령을 피해 끝없는 피신의 길에 있었지만 최시형은 늘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마음이 위축되기는커녕 도리어 동학사상에 폭과 깊이를 더했다. 스승 최제우는 ‘시천주’(侍天主)라 하여, 자아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 인격신으로서의 하늘을 모셨다. 그에 비해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를 말하였다. 자아의 내부로 들어온 하늘, 즉 내재하는 천주를 기르자고 하였다.

천주의 내재성에 대한 그 신념은 확고해 마침내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인간은 자신만큼이나 존귀한 만물의 도움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자각이었다. 현대의 언어로 말하면 최시형은 ‘생태적 전환’의 선구자였다. 평등과 평화에 기초한 우주만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최시형의 사상 지도에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 유럽시민사회가 지향한 인간중심도 그에게는 마땅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면 그의 사상을 만물평등주의라고 이름 붙이겠다. 어두워 가는 19세기 말 이 땅의 가난한 평민 가운데 최시형과 같은 사상가가 나와 희망의 싹을 틔웠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최시형이 애써 개척한 길을 따라가지 못했다. 입버릇처럼 인권을 말하는 이는 많아도, 차별과 소외의 질척한 늪은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 세상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불편하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심각한 빈부격차로 인해 세상이 한층 더 어두워진 점도 있다. 하물며 최시형이 강조한 우주자연과 인간의 관계회복은 이제 더더욱 난감한 일이 되었다. 파괴된 자연은 혹심한 이상기후와 전대미문의 질병으로 응답한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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