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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 관능미와 저항의 상징

입력
2015.07.23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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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연수원에 들렀다가 벽면에 정리된 '연혁'이란 단어가 눈에 띈다. ‘연혁(沿革)’에는 ‘변천과정, 면도날을 갈기 위해 쓰는 가죽’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가장 잘 팔리는 기업 강의 주제가 혁신이다. 도처에서 위기와 혁신을 부르짖는다. 혁신을 인문학과 결합시켜 ‘역량강화’란 미명하에 전달한다. 직원들의 반응은 뜨겁다. 그들은 인문학을 통해 현대문화를 읽는 능력을 얻고자 하며, 권위 있는 지식을 얻어 소통에서 우위를 얻으려는 이도 있다. 업무와 연결된 해답을 구하기도 하며, 조직 내 인간관계가 깨질 때 그 이유를 궁금해 하는 이들도 있다. 창의성, 전략적 사고, 문제해결, 협상전략과 같은 기업교육은 인간 자체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내가 연혁이란 단어에 눈길이 멈춘 이유다.

때로는 관능미를, 때로는 저항성을 상징하는 가죽. 게티이미지뱅크
때로는 관능미를, 때로는 저항성을 상징하는 가죽. 게티이미지뱅크

‘따를 연(沿)’자는 물(水)과 산 속의 늪(?)이 결합된 말이다. 산에서 발원한 물이 아래를 향해 흐른다는 뜻이다. 이는 자연스레 인간이 누적해온 방법론의 흔적이자 조직이 상황에 따라 변신해온 외양의 역사를 포함한다. 그런데 이 한자를 음미할 때마다 씁쓸하다.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레 흐르며 만들어진 ‘정신의 기준’이란 뜻보다, 물이 흐르지 못한 채 상부에 고인 채 썩어가는 늪이 떠올라서다.

연혁이란 단어를 구성하는 두 번째 단어는 가죽 혁(革)자다. 패션의 역사를 연구하는 내게 가죽 혁(革)자는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다. 척박한 외부환경으로부터 인간의 몸을 지키고 안식처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과제였던 고대부터, 동물을 식량으로 조달하고 남은 부산물을 사용해 만든 가죽만큼 인간을 보호하는 소재가 없었다. 겉은 털로, 속은 지방층으로 덮인 원피를 버리고 내구성과 형태를 가진 스킨을 바느질해 옷으로 입으면서 패션도 태어났다. 인간의 패션을 ‘제2의 피부(Second Skin)’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급스러움과 관능미 같은 단어가 상기되는 소재지만 오늘날에도 가죽으로 옷을 만들려면 고대부터 내려온 수작업을 거친다. 가죽 한 벌이 옷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최소 25명의 손을 거친다. 손이 많이 타는 소재다.

그만큼 가죽이 담아내는 문화적 의미도 깊고 다양하다. 고대 그리스 제사장들은 꿈속에서 예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가죽 깔개 위에 누워 잠을 청했고, 이집트인들에게 가죽은 악령을 쫓는 종교적 의미가 있었다. 가죽은 저항정신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1950년대 영화배우 말론 브란도가 영화 ‘위험한 질주’에서 입었던 모터사이클용 가죽재킷은 전후 기성세대에 대한 청년들의 저항을 상징했다. 술을 장식한 스웨이드 재킷은 원래 카우보이와 북미 원주민 복장이었으나, 1960년대에는 기성체계에 저항하는 히피의 상징으로 쓰였다.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 조종사들이 입던 가죽재킷은 영웅의 징표인 반면 나치 친위대가 입은 블랙 가죽 코트는 공포를 상징한다.

가죽 혁(革)자는 무두질을 한 가죽이다. 무두질은 가죽제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공정이다. 힘을 가해 살에서 뜯어낸 동물의 원피를 내구성과 탄력성을 가진 가죽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무두질은 탄닌산을 이용한다. 이렇게 하면 깊이 있는 색을 지니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변하게 된다. 무두질 기술의 수준에 따라 가죽제품이 고급과 저급으로 나뉜다.

신기한 건 무두질을 통해 원피의 단백질 구조가 완전히 바뀐다는 것이다. 사물의 형질이 완전히 바뀐다는 뜻이다. 참나무에서 추출한 탄닌산을 통해 오랜 시간 인간을 안아주는 한 그루의 거대한 나무처럼, 세상의 모든 가죽은 세월의 흐름 속에 인간과 함께 늙어간다. 삶의 연혁은 물 흐르듯 자연스런 변화와 타율에 의한 변화를 포함한다. 자연스런 변화만으로 조직은 움직이지 않는다. 외부의 힘에 의해 생살을 찢는 변화도 동반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인분 교수’사건, 국정원의 해킹사건을 보며 생살을 찢어서 무두질을 해야 할 조직과 인간들이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사회의 단백질 구조를 바꿀 무두질은 어떻게 이뤄낼 수 있을까? 우리의 숙제다.

김홍기ㆍ패션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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