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 가공 선원들 분노 그린 작품
가동 중인 공장을 무대로 개조해, 정교한 몸동작 통해 극한 노동 복원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던 2008년, 일본에서 발표된 지 80년이 지난 문학작품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일본 공산당원이었던 고바야시 다키지(1903~33)가 1929년 발표한 ‘게공선’으로 러시아 캄차카 연해에서 게를 잡아 통조림으로 가공하는 선박의 가혹한 노동조건에 분노를 느낀 선원들의 투쟁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4년 후 일본 공안의 고문으로 숨진 작가의 작품은 2008년 1월 마이니치 신문에 “워킹푸어(일하는 빈곤층)와 프리터(저임금 아르바이트 생활인)의 현실이 ‘게공선’의 세계와도 통한다”는 작가 아마미야 가린ㆍ다카하시 겐이치로의 대담이 실리면서 이례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8월 2일까지 영등포 양평동 인디아트홀 공에서 공연되는 ‘게공선’은 일본에서처럼 지금 한국 자본주의를 반추한다. 무대가 마련된 곳은 가동 중인 금형ㆍ사출 공장 2층을 개조해 만든 ‘공장 위 극장’. 매트를 깔아 만든 간이 무대와 객석까지 환히 비추는 형광등, 프레스 기계처럼 노출된 음향기기가 관객을 맞는다. 주변 공장들의 소음과 뱃고동 소리가 섞인 10여분의 정적 후, 러닝셔츠 차림의 배우들이 매트에 올라 그물을 던지고 올리는 마임을 통해 1920년대 지옥의 배, 게공선을 재현하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우리가 이 깜찻까에 빠져 죽어도, 도쿄 사무실에 앉아 있는 회사 중역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야. 지금과 같이 금리가 떨어지고 현금이 남아도는 때는 척당 수 십 만 엔씩 걸려 있는 보험금을 타내는 게 훨씬 더 이익이야.”
‘그물 준비’ ‘게 통조림 만들기’ ‘태업’ ‘파업’으로 이어지는 10개 장면에서 10여명의 배우들은 정교한 몸동작으로 몸이 닳아 없어지는 극한의 노동과정을 복원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선원들은 스스로 “경쟁!”을 외치며 온몸이 덜덜 떨릴 때까지 게 통조림을 만들고 나른다. 에어컨조차 가동되지 않는 찜통 극장에서 배우들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반대로 의식은 또렷해진다. “이런 곳에 오면 누구라도 투사가 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니까.”
극장 아래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이 내뿜는 기운만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이 작품은 원작의 유명세로 공연 첫날인 22일 80여 객석이 매진됐다.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10개의 분절된 장면, 투박한 무대와 때때로 불명확한 배우들의 발음, 땀으로 셔츠가 흠뻑 젖다 못해 매트 위에 흩뿌려지는 열연은 관객마다 호불호가 나뉘겠지만, “관객이 끔찍한 감각을 느끼게 하라”는 연출 의도에는 정확히 부합한다. 끝없이 관객의 불편을 자극하는 이 작품은 끝내 파업을 주도한 선원들이 제국군함에 진압되며 “20년대 게공선의 문제가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제”(강량원 연출)로 인식하게 만든다.
제17회 서울변방연극제 폐막작인 ‘게공선’의 뾰족한 문제의식이 올해 연극제를 관통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 학살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한 일본어 발음 ‘십오원오십전’을 주제로 한 이번 연극제는 8월 2일까지 서울 종로와 흑석동 일대에서 11개의 연극, 전시, 강연, 다큐멘터리를 선보인다. 연극제 주최측은 정부지원금을 마다하고 온라인(www.tumblbug.com/ko/smtfestival)에서 이달 27일까지 후원금을 모금해 축제를 꾸린다. (02)3673-5575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