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발표된 핑크 플로이드의 10번째 앨범 ‘애니멀스’는 음악만큼이나 앨범 재킷으로도 유명하다. 붉은 벽돌 건물 위에 우뚝 솟은 거대한 굴뚝 네 개에서 나온 검은 연기는 구름과 뒤섞인다. 저녁의 붉은 빛을 받은 건물은 음울한 인상을 더한다. 분홍색 돼지 인형이 을씨년스러운 하늘에 무심한 듯 떠다니고 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느슨하게 참조한 이 앨범은 개, 돼지, 양으로 산업사회의 계층에 대해 노래한다. 이런 콘셉트를 잘 드러내기에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더할 나위 없다. 산업혁명의 중심지 런던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발전소보다 더 적합한 예를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30~1950년대에 걸쳐 완공된 배터시 발전소는 유럽에서 가장 큰 벽돌 건물로 런던 템즈 강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핑크 플로이드 외에도 비틀스, 호크스아이 등 밴드의 앨범, 현대 런던을 배경으로 재해석된 셰익스피어의 ‘리처드3세’ 같은 영화에도 등장했다.
1983년 발전을 완전히 멈춘 발전소는 런던 재개발 계획의 단골 손님이 된다. 여러 계획안이 수립되었다 무산되기를 거듭했다. 지금은 무려 30년을 넘게 방치된 끝에 2016년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네 개의 굴뚝과 벽돌 건물은 보존한 채로 이루어지는 재개발 계획이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개발의 조급함을 이긴 것이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자본이 모이는 런던에서 그 긴 시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 시간 동안 발전소는 폐허로 명성을 쌓아갔다. 폐허, 그 중에서도 개발과 경제 발전이 무한할 것 같았던 시절을 증언하는 산업 구조물, 도시 인프라스트럭처 등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장소로 급부상했다. 혹자는 폐광촌, 버려진 발전소 등을 ‘진정한 폐허’라고 부르며 폐허의 미학을 예찬하고, 이런 곳을 찾아 나서는 이들은 스스로를 ‘도시 탐험가’라고 부른다.
시간과 공간 모두 철저히 계량화되어 값이 매겨지는 요즘, 모든 것이 멈춰선 채 버려진 곳이야말로 자본의 손아귀를 벗어나 있는 인상을 자아낸다. 이 장소가 빚어내는 미묘한 분위기, 쇠락한 것이 풍기는 음습함,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듯한 느낌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도시탐험가들은 배터시 발전소 같은 폐허뿐 아니라 철통 보안을 자랑하는 대기업 건물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공공시설물에 잠입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도시탐험가의 일원이면서 이들에 대한 내부보고서인 ‘도시해킹’을 펴낸 브래들리 개릿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서울에서는 폐허보다 살아 있는 공간에 잠입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한다.시간의 풍화를 겪으며 폐허로 남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재개발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서울은 멈추어선 시계를 용납하지 않는다. 성공적인 리노베이션으로 손꼽히는 선유도 공원은 정수처리시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도록 곳곳의 과거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정작 정수장의 원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한강의 섬 전체를 콘크리트 구조물로 바꾸어 놓은 시설이었지만 거의 완전히 감추어진 장소였다. 재개발과 재건축이 일어나기 전의 잠실과 반포 주공아파트에 대한 기억도 어느덧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한 시대의 이상과 욕망, 기술, 생활사 등 거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던 이 장소들이 얼마나 기록으로 남아 있을까. 배터시 발전소처럼 도심내 강변에 자리한 국내 최초의 화력발전소인 마포 당인리 발전소는 발전 시설을 지하화하고 지상은 공원으로 탈바꿈될 예정이다. 발전 시설 일부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된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처럼 대중문화가 장소를 전유함으로써 기억을 전하거나 폐허의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가 없는 서울에서는 꼼꼼한 기록만이 답일 것이다. 오래된 것은 다 아름답다고 상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세대가 공유하는 기억 없이 문화가 꽃피기는 어려운 법이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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