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세상살이에 지친 젊은이, 캘리그라피·종이접기 등 수작업에
작은 성취감 느끼며 마음 다독여
자기만의 세계 빠져 든 순간, 뭔가 창조한 느낌에 "살아있구나"
“신청곡을 써드립니다.”
직장인 최수아(26)씨는 독특한 취미를 갖고 있다. 사람들이 무심코 흘려 보내는 가사를 최씨만의 독특한 글씨체로 그려내는 것이다. 노래 가사가 담고 있는 감정을 자신만의 글씨체로 녹여내는 것이 포인트다. 최근 그린 노래는 그룹 엑소의 ‘으르렁.’ 엑소의 누나팬을 자처한 지인의 신청곡이다. 최씨가 그린 ‘으르렁’은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진 글자 하나하나가 입체적으로 뛰어 노는 듯한 느낌을 준다. 멜로디 없이 가사만 보는 데도 노래를 들을 때처럼 마음이 들뜨는 이유다.
최 씨가 캘리그래피로 가사를 그리기 시작한 건 불과 6개월 전이다. 단순히‘글씨를 예쁘게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하다 보니 재미가 붙었다. 캘리그래피(calligraphy)는 ‘아름답게 쓰다’라는 어원에서 비롯돼 ‘글씨나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을 일컫는다. 캘리그래피의 최종 목적은 ‘나만의 글씨체’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최씨 또한 조금씩 각을 잡아가는 그만의 글씨체가 주는 묘한 성취감에 이끌렸다. 붓 펜을 잡은 손 끝에서 전해져 오는 짜릿함도 낯선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최씨는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성취감이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말했다.
2030의 무뎌진 손 근육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펜을 잡는 손의 모양조차 ‘어색하다’ 느낄 정도로 손으로 하는 거라곤 마우스로 클릭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휴대폰 메신저를 보내는 게 전부였던 사람들이 다시금 펜을 잡고 블록을 조립하고 종이를 접으며 손 끝 감각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캘리그래피, 컬러링북, 나노블록 그리고 한 때 우상이었던 종이접기의 대가 김영만씨가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불러 일으킨 종이접기 열풍이 대표적 예다. 다른 취미 생활에 비해 많은 도구나 비용을 요하지 않으면서도 나 홀로 즐길 수 있다는 점, 또 내 손으로 단시간에 결과물을 만들어 냄으로써 묘한 성취감을 갈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 때 힐링은 덤이다. 복잡한 사회관계망에서 한 발 물러나 소소하지만 오롯이 ‘내 손’으로 만들고 그리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걸 왜 해?’ 하다가도 막상 시작하면 ‘이래서 하는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김지은(25ㆍ직장인)씨 또한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그림에 색을 입히며 즐거워하는 직장 동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치하다’고 까지 생각했을 정도다. 하지만 한 번 색연필을 들기 시작하자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색칠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림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그 성취감에 이끌려 또 다른 그림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두 달 만에 컬러링 북 한 권을 완성했다. 김씨는 “주말이나 퇴근 후 혼자 있는 시간이 어색해 ‘시간 죽이기’용으로 영화를 다운로드 받거나 텔레비전을 보곤 했는데 컬러링북을 접하고 난 이후론 작은 성취감과 함께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게 됐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활달함을 뽐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주말 마다 나노블록을 조립하고 이를 친한 지인들에게 선물한다는 박현선(27ㆍ가명)씨도 “블록은 길어야 30분이면 완성되는 데다가 조립하다 보면 이것에 집중해 잡념을 잊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가격대도 9,000~1만원으로 저렴해 일주일에 1~2개 정도는 꾸준히 조립하고 있다. 그렇게 조립한 블록만 벌써 30개가 넘는다. 박씨는 “컴퓨터 앞에 앉아 무기력하게 누가 시키는 것만을 수동적으로 하던 내가 블록을 조립할 때만큼은 주체적인 나로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지루한 일상을 특별하게 기록하고자 캘리그래피를 시작했다는 이예진(26ㆍ직장인)씨도 “관성적인 하루하루를 나만의 개성적인 글씨체로 표현하고 나면 어느새 그 하루가 특별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씨는 “회사에서 하는 생산성 없는 잡무에 지쳐가던 차에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느낌이 새로운 감흥을 준다”며 “기회가 되면 보다 다양하게 손을 활용할 수 있는 목공이나 드로잉도 배워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젊은이들이 손 끝 감각을 되살려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더러 ‘셀프 힐링’이라 칭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거대한 것을 꿈꿨다 좌절을 맛본 청년들이 이제는 작아도 본인들이 실제로 이룰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이를 통해 얻는 작은 성취감으로 일종의 셀프 힐링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도 “인간은 본래 자기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조립하고 그리면서 성장하고 생각하는 동물”이라며 “수동적인 인간관계에 지친 청년들이 본능적으로 다시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데 집중함으로써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주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여선애 인턴기자(서강대 프랑스문화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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