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혐오주의 소설 아니지만, 원하면 그런 작품 쓸 권리 있다"
프랑스가 이슬람 국가가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왕을 죽인 나라, 가부장제가 붕괴하고 동거가 보편화된 나라, 브래지어를 불태우며 성해방을 외친 나라가 알라를 섬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최근 만연한 이슬람 공포증은 이 실낱 같은 가능성도 그냥 지나질 수 없게 만드는가 보다. 자본주의와 함께 그 밑천을 드러낸 근대 서구문명에 절망한 이라면 특히 더 그렇다.
미셸 우엘벡의 ‘복종’(문학동네)은 이슬람 혐오주의를 부추기는 내용 때문에 1월 출간 전부터 초미의 관심사가 된 소설이다. 배경은 2022년의 프랑스. 양대 정당인 우파 대중운동연합과 좌파 사회당이 대중의 외면을 받으면서 극우 국민전선과 이슬람박애당이 결선에 진출하는 이변이 일어난다. 극우정권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 다른 정당들이 이슬람 정당과 연합하고 프랑스에는 사상 초유의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다.
이 격변의 현장에 프랑스3대학의 교수 프랑수아가 있다. 교사로서의 소명이나 인류애 따윈 관심도 없는 프랑수아는 학업과 연애에서 모두 정점을 찍은 뒤 허무주의에 빠진 사십 대 중반의 남성이다. 무슬림 대통령이 당선된 후 파리3대학은 파리-소르본 이슬람대로 명칭이 바뀌고 무슬림으로 개종하지 않은 프랑수아는 실직한다.
히잡을 뒤집어 쓴 여학생과 사회에서 가정으로 돌아간 여성들, 일부다처제, 정교통합 등 프랑스는 혁명 이전으로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극심한 실업률은 여성이 노동현장에서 빠져나감으로써 완화되고 중동에서 유입된 막대한 오일머니는 프랑수아에게 두둑한 퇴직금을 챙겨준다. 이민자 갈등으로 인한 범죄는 대폭 감소하고 정부가 나서야 했던 수많은 사회문제들은 가정이 권위를 회복하면서 자체적으로 해결된다.
프랑스에 이어 벨기에까지 이슬람 국가로 바뀌며 프랑수아는 큰 혼란을 느낀다. 이슬람이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로 몰락한 서구문명의 효과적인 대안이라면 그것을 거부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무슬림 대통령은 오늘날의 기독교가 이성주의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동성결혼, 낙태, 여성의 노동을 막는 데 실패했다면서 이슬람이야말로 새 시대의 체제임을 설파한다. 결국 프랑수아는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일부다처제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에 부푼다.
우엘벡이 이슬람을 혐오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인터뷰에서 “이슬람은 가장 멍청한 종교”라고 비난했던 그는 바깥 출입이 뜸했던 2011년엔 알카에다에 납치됐다는 소문에 휘말리기도 했다(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우파 아나키스트인 그는 현대 서구문명의 여러 면모 또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는데, 과거 노골적인 여성 비하 발언과 ‘소립자’ 등에서 드러낸 개인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전통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종교로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교를 택한 것은 의외이자, 고약한 의도가 숨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케 한다. 보수 마초인 프랑수아가 사실상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때, 결과적으로 자신의 반-인권적 가치관에 쏟아질 비판을 그토록 미워하던 이슬람이란 방패로 막은 셈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작가는 정말로 이슬람을 서구문명의 대안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오래 전 이슬람을 향해 침을 뱉은 우엘벡은, 그 이슬람 앞에 자신이 속한 세계가 무릎을 꿇는 상황 - 아마 그가 그릴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염세와 공포로 빚은 디스토피아를 탄생시켰다.
소설이 출간된 1월 7일은 공교롭게도 마호메트 풍자 만평을 실은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부터 총격 테러를 당한 날이다. 이 기막힌 우연 때문인지 ‘복종’은 현재까지 프랑스에서 56만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각각 27만부, 10만부나 팔려나갔다. 테러의 충격이 가신 뒤 열린 행사에서 작가는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장치로서 (이슬람 정당의 집권을) 이용”한 것을 인정하면서 “‘복종’은 이슬람 혐오주의 소설이 아니지만 원한다면 우리에게는 이슬람 혐오주의 작품을 쓸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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