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톤치드 듬뿍, 편백 숲 우드랜드
새색시같이 정갈하고 커리어우먼처럼 단정한 숲이 있다. 시골총각처럼 수수하고 프리랜서처럼 자유분방한 숲이 있다. ‘편백 숲 우드랜드’와 보림사 비자림, 전남 장흥의 두 숲은 같은 지역에 있지만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낯설게만 들리던 피톤치드(phytoncide)라는 말은 어느새 산림욕, 숲 치유 등과 동의어가 되었다. 나무에서 내뿜는 유기화합물로 주위의 미생물을 죽이거나 성장을 억제해 면역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톤치드를 많이 배출하는 나무는 단연 편백이고, 구상나무 삼나무 등이 뒤를 잇는다. 시기적으로는 여름철, 오전 10시~12시 사이 가장 활발하게 배출된다. 장흥 ‘편백 숲 우드랜드’는 대표적인 휴양 숲이다.
편백 숲은 장흥읍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는 억불산 북측 자락 100만㎡를 덮고 있다. 1960년대에 편백과 삼나무(약 7:3의 비율)를 심기 시작했으니 수령이 50년 정도 된다. 이 중 장흥군이 약 20만㎡를 사들여 치유의 숲으로 꾸몄다.
편백나무 톱밥을 깐 짧은 산책로를 통과하면 걷기 편한 데크 길이 이어진다. ‘말레 길’이라 부른다. 마루의 전라도 사투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오르막 구간도 지그재그로 연결해 계단이 없는 무장애(barrier free) 산책로다. 쭉쭉 뻗은 나무 줄기는 깔끔하게 다듬었고, 바닥에는 야생화를 심어 정갈하다. 말레 길 사이 폭포도 시원하고 연못도 가지런하다. 대신 원시 숲이 주는 신비감은 떨어진다.
말레 길 가장 높은 곳은 우드랜드가 자랑하는 ‘비비 에코토피아’다. (외래어 사랑이 지나치다. 우드랜드는 뜻이라도 짐작하지만 ‘비비 에코토피아’는 종잡을 수 없다.) 통풍이 좋은 종이 옷을 입고 바람목욕(風浴)을 즐기는 곳이다. 편하게 누워 쉴 수 있는 벤치와 해먹(그물침대), 통나무에 흙을 씌운 토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숲을 즐긴다. 별도로 3000원의 옷 대여료를 내야 입장할 수 있다. 처음에는 ‘누드 숲’이라고 알려져 비난과 관심을 한꺼번에 받았다. 결과적으로는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편백 숲에는 이외에도 편백소금집과 목공예체험장 등 즐길 거리와 한옥 숙소, 식당 등 편의시설도 두루 갖추고 있다.
●천년사찰 보림사와 비자림
바둑을 즐기는 사람들은 은행나무나 피나무 바둑판을 자랑거리로 삼는데 최고급 품은 비자반(榧子盤)으로 친단다. 향기가 좋고 돌을 놓을 때 소리까지 은은하기 때문이다.(박상진, 우리나무의 세계2). 한국의 비자나무는 주로 제주와 남해안에서 자라는데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어 바둑판이 될 신세는 면했다.
보림사 비자림은 제주나 고흥처럼 알려진 숲은 아니다. 똑 같은 나무가 일렬로 죽 늘어서 길을 만든다면 보기는 좋겠지만 숲이라 부르기엔 한계가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나무가 위 아래를 채우고, 여러 수종이 뒤섞여 있는 모습이 생태적으로는 건강한 숲이라 할 수 있다. 보림사 비자림은 바로 그런 숲이다. 일련번호를 붙인 600그루의 비자나무는 보림사를 중심으로 산재해 있다. 사찰 바로 앞에도 몇 그루 있고, 장흥댐 상류 탐진천 좌우로도 흩어져 있다. 짧은 구간에 가장 밀집한 곳은 보림사를 뒤로 크게 한 바퀴 도는 1km 남짓한 산책로다.
사찰 경내로 들어서기 전 오른편 부도 탑 부근이 시작점이다. 아름드리 나무가 밀집한 숲을 상상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비자나무는 산책로를 따라 띄엄띄엄 이어진다. 그러나 광택이 나는 뾰족한 잎은 비자나무를 모르는 사람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침엽수인데도 쭉 뻗어 오르지 않고 아래서부터 가지를 뻗어 그늘을 넓게 드리운다. 보림사 바로 뒤편은 ‘비자나무 산림욕장’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벤치 몇 개 놓은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시설이 없어 더없이 한가롭다.
길은 오솔길 수준이지만 힘들지 않고 정겹다. 양편으로는 비자나무보다 오히려 참나무 종류가 더 많다. 바닥은 듬성듬성 야생 차나무 차지다. 보림사에서 ‘청태전 티로드’라고 따로 이름 붙였을 정도로 차나무가 많다. 청태전(靑苔錢)은 잎을 찧어 엽전모양으로 만들어 발효시킨 차로 모양새를 본 따 돈 차라고도 부른다. 고려시대부터 만들었다는 보림사 특산물이다. 장흥에서는 차 시배지로 알려진 경남 하동보다 보림사 차가 더 오래 됐을 거라고 주장한다.
불교 미술에 관심 있다면 보림사엔 눈 여겨 볼 문화재가 많다. 대적광전 앞의 삼층석탑과 석등(국보 제44호)는 불국사 석가탑을 닮았고, 내부의 철조비로나자불좌상(국보 제117호)은 명확하게 만든 시기(858년)가 새겨져 있어 불교미술사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사천왕상(보물 제1254호)도 나무로 만든 것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많은 국보와 보물보다 범인들에겐 사찰 한가운데 빨래터처럼 보이는 약수터가 반갑다. ‘보림약수’라 이름 붙이고,‘韓國의 名水’라고 쓴 표지석의 근거는 알 수 없지만 물맛은 달고 시원하다.
●물 좋은 득량만, 물 축제 탐진강
그 바다는 맑지도 넓지도 않다. 흔히 덧붙이는 에메랄드 빛과는 거리가 있고, 수평선은 크고 작은 섬들에 막혀 있다. 대신 그 바다는 풍부하다. 낙지와 김과 키조개와 꼬막을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전남 장흥과 보성 고흥 완도로 둘러싸인 득량만 얘기다.
장흥 안양면(장흥에서 부산 안양 용산은 면 단위고 대덕도 일개 읍에 불과하다) 수문해수욕장은 해수욕장이라 부르기 주저할 만큼 조그만 해변이다. 백사장이 넓은 것도 아니고 모래가 특별히 곱지도 않다. 그래서 달뜬 열기 보다는 한가한 해변이 그리운 사람에게 더 어울린다. 수심이 얕지만 바닥이 훤히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이 곳은 물 좋기로 소문나 있다. 해수욕장에서 바로 건너편은 고흥 소록도와 거금도다. 일제시대 한센인들이 소록도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물던 곳이었는데, 이곳 바다에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증상이 조금은 완화됐단다. 갯벌해변이기 때문이다. 서해 대천해수욕장이 머드 축제로 이름 날리고 있지만, 득량만이야 말로 피부에 좋은 갯벌의 원조인 셈이다.
득량만 물이 요 근래 더 좋아진 것은 장흥이 자랑하는 무염(無鹽) 김 생산 덕분이다. 염산은 김의 잡티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농사로 치면 제초제 역할을 한다. 2011년부터 장흥군은 김 양식장에 염산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후 굳었던 뻘이 차츰 살아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낙지가 급격히 늘었다는 점이다. 전국 생산량의 30%, 장흥은 단숨에 전국에서 낙지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으로 발돋움했다.(그러나 목포 세발낙지, 무안 뻘 낙지, 영암 독천낙지 등에 밀려 브랜드화에는 실패했다) 장흥에서 잡히는 낙지의 85%는 외지로 나간다. 갯벌이 물러지고 제 기능을 찾으면서 조개 꼬막 바지락 키조개 등의 생산도 꾸준히 늘고 있다. 대부분(약 80%) 어선이 1톤 미만의 소형이고 대형 화물선의 왕래가 없는 것도 득량만을 살리는데 한 몫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보성 조양창에서 식량을 구해왔다는 데서 비롯한 득량만이 이제는 어족 자원이 그득한 수산물 창고가 된 것이다.
정남진 해양낚시공원은 득량만의 풍부한 어족자원을 활용하는 방안으로 만든 시설이다. 회진면 대리에 자리한 이 공원은 해양공원이면서 낚시터다. 바다 위에 여러 갈래 잔교를 만들어 산책로 겸 낚시터로 활용한다. 입장료는 1,000원이지만 낚시를 하려면 2만원(청소년은 1만원)을 내야 한다. 아침 나절에는 감성돔이 주로 잡히고 저녁과 밤에는 갯장어가 많이 잡힌다. 낚시에 재주가 없어도 40~60cm 크기의 감성돔을 예닐곱 마리는 낚을 수 있단다. 밤 낚시를 즐기는 이들을 위해서 바다 한 가운데 뜬 콘도 시설도 운영하고 있다.
한가하게 보내기는 용산면 남포부락이 제격이다. 이렇다 할 시설이 없는 평범한 어촌마을이지만 마을 앞 소등섬의 일출풍경이 일품이다. 소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작은 섬이다. 섬에는 소박하지만 간절하게 기도하는 여인상이 눈길을 끈다. 섬 이름도 바다에 나간 남편과 가족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밤새 불을 켜 놓고 기도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했다.
만조 때면 바다에 잠기는 길이 100m 정도의 곡선 바닷길이 바다 풍경과 썩 잘 어울린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에도 등장한 곳이다.(동명소설의 원작자 이청준도 이곳 장흥 출신이다.) 섬 주변으로 굴과 바지락이 생산되는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어 굴 구이를 맛보려는 미식가들에게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장흥 바다에 득량만이 있다면 육지에는 탐진강이 있다. 탐진강은 영암에서 발원해 장흥읍내 한 가운데를 거쳐 강진군에서 남해로 흘러 든다. 길이 56km의 작은 강이지만 장흥에서는 보배 같은 존재다. 농업용수로 주로 사용되는 것을 빼면 오염원이 거의 없어 읍내를 통과하는 구간에서도 맘놓고 발을 몸을 담글 수 있을 정도다.
맑은 탐진강 물을 활용한 장흥 물 축제는 올해로 8회를 맞는다. 축제기간(7월 31일~8월 6일)에는 읍내에서 물길로 10km 상류에 있는 장흥댐에서 차가운 물을 내려 보낸다. 약 16℃의 댐 물이 축제장소인 읍내에 도달하면 21℃정도가 된다. 물만 차가운 게 아니라 주위의 열기와 섞여 작은 물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강 주변이 시원해진다. 올해 축제는 초청가수 공연 등 보여주기 식에서 벗어나 참가자들이 최대한 즐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단다. 읍내에서 출발한 ‘지상 최대의 물싸움’ 퍼레이드가 탐진강으로 이어지고, 강에서는 맨손 물고기 잡기를 비롯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열린다.
장흥=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여행메모]
●장흥까지 차로는 영암순천고속도로 장흥IC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KTX를 이용한다면 나주역에서 가장 가깝다. ●장흥에서는 홍어가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형식의 삼합 요리가 유명하다. 장흥읍내 신가네 식당(이하 지역번호 061, 863-6663)은 낙지+키조개+돼지고기가 결합한 낙지삼합, 만나 숯불갈비(864-1818)는 한우+키조개 관자+표고버섯을 함께 먹는 장흥삼합을 잘한다. 수문해수욕장 인근 여다지회마을(862-1041)은 갯장어 샤브샤브로 유명하다. ●장흥읍내에선 매주 토요시장이 대규모로 열린다. 생산 주민들이 직접 참가하는 어머니 텃밭장터에서는 표고버섯과 파프리카 등 지역 농산물을 싸게 살 수 있고, 장흥삼합을 비롯한 지역 먹거리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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