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황상 국정원 직원 작성 문서 불구
이메일 첨부 파일은 증거 인정 안돼
대법, 검찰의 판례 변경 요청도 거부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판단을" 지적

국가정보원 직원의 이메일에서 나온 증거들인데, 이메일 본문은 증거로 인정되고 첨부파일은 인정이 안 된다면? 더구나 첨부파일은 메일 주인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어 작성자가 국정원 직원임을 드러내 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최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불법대선개입 사건 판결에서 이 같은 법의 허점이 드러났다.
지난 16일 원 전 원장의 항소심을 파기환송한 대법원 판단의 핵심은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5팀 직원 김모씨의 이메일에 첨부된 텍스트 파일(425지논, 시큐리티)을 증거로 인정하느냐였다. 20일 검찰과 법원에 따르면, 수사과정에서는 김씨가 실제 작성했다는 강력한 증거들이 있었다. 문제의 첨부파일에 ▦안보5팀 22명 직원의 이름 앞 두 글자와 담당 트위터 계정이 나열돼 있는데다 ▦날짜ㆍ지역ㆍ카페명 등 트위터 활동장소를 기재한 내역이 김씨 본인의 통화추적 장소와 일치하고, ▦파일이 네이버 이메일 계정의 ‘내게 쓴 메일함’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또 김씨는 법정에서 “업무에 필요한 자료들을 모아 이메일의 본문 내지 첨부파일로 해서 내 이메일에 보내놓고 활용한 사실이 있고, 첨부 파일은 메모장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텍스트 문서 형태였다”고 인정했다. 다만 그는 “해당 이메일 계정을 내가 사용한 것은 사실이고 다른 사람이 위 이메일 계정을 사용한 사실은 없으나, 425지논ㆍ시큐리티 파일 등의 첨부파일을 작성한 기억은 없다”는 취지로 얼버무렸다.
문제는 현행법(형사소송법 313조 1항)과 대법원 판례에 따를 경우, 김씨가 첨부파일을 작성했다는 간접 증거들을 아무리 제시해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형소법 313조 1항은 문서의 경우 작성자가 법정에서 “직접 작성했다”고 인정해야만 증거로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은 디지털 저장매체로부터 출력한 문서에도 이 조항을 적용해, 오직 법정 진술로 시인할 때만 증거로 인정토록 하는 엄격한 판례를 형성해왔다.
검찰이 상고심에서 “형소법 313조 1항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해석해야 한다”며 판례 변경을 요청했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나름 경청할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입법을 통해 해결하는 것은 몰라도 해석을 통해 실정법의 명문조항을 달리 확정 적용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디지털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의 허점으로 인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실체가 제대로 법적 판단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6부(부장 김상환)는 “김씨의 법정 진술만으로는 파일들의 작성자라고 보기 어렵지만, 여러 사실 및 사정들을 종합하면 첨부 파일의 작성자는 김씨임을 알 수 있다”고 전제하고, 다른 형소법 조항(315조 2ㆍ3호)을 적용해 업무상 통상문서로 볼 수 있다고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대법관 13대 0의 의견으로 업무상 통상문서의 정의도 좁게 해석해 파기했다.
김청환기자 chk@hankookilbo.com
김관진기자 spiri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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