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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금융개혁의 정공법

입력
2015.07.2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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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주인은 주주도 경영진도 아니다. 은행에 돈을 맡긴 수많은 예금주, 그들이 진정한 주인 아니겠나.”기술금융 정책이 한창 추진되던 지난 겨울 금융당국 고위관계자가 말했다. 정말 그런가, 알쏭달쏭했다. 다만, 적잖은 논란에도 기술금융을 금융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밀어붙이는 정부의 속내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은 들었다.

보유 자산이나 현금흐름이 부족하더라도 소정의 기술력 평가 등급을 획득한 기업이라면 저리의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한 기술금융 정책은 시행 초기부터 시장 원칙에 반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시장가치를 매길 수 없는 기술이 어찌 담보력을 지닐 수 있는가” “엄연한 민간기업인 은행의 경영에 당국이 왜 개입하느냐” 등 힐난 섞인 반문으로 시장은 웅성거렸다. 외환위기로 은행 역시 구조조정의 풍파에 휩싸였던 사정이 있긴 했지만, 벤처금융 활성화라는 정공법을 통해 벤처산업 붐을 일으켰던 김대중 정부 시절과 비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당국은 그러나 끄떡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술금융 실적을 은행 경영평가에 대거 반영하는 강공책으로 은행들 꽁무니에 불을 붙였다. 그날 그 당국자처럼, ‘은행의 주인은 국민이므로 국민의 대리자인 정부 또한 은행 주인과 마찬가지’라는 신념을 공무원 각자가 철저히 내면화한 걸까, 싶을 정도였다.

은행은 공공재라는 믿음 때문이든, ‘관(官)은 치(治ㆍ다스리다)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소신 때문이든, 은행을 틀어쥐는 금융당국의 솜씨는 현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창조경제와 맞물려 빛을 발하고 있다. 혁신기업 창업 지원을 통해 ‘제2의 벤처붐’을 일으키겠다는 창조경제 정책의 주요 집행자로 은행이 동원된 것이다.

은행지주회사를 경영해본 모피아(재무부 출신) 임종룡 금융위원장의 취임 이후 기술금융이 다소 동력을 잃고 핀테크(IT기술을 접목한 금융서비스)가 급부상하면서 은행의 역할은 대출을 넘어 멘터링이나 사업 제휴 등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차원으로 확장되는 형국이다. 핀테크는 당국엔 창조경제와 금융산업의 병행 발전을 견인하는 ‘신의 한 수’이겠지만 은행으로선 자기 앞마당을 넘보는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 손으로 길러야 하는 ‘딜레마’다. 당국이 ‘세계 최초’를 표방하며 내년까지 구축하겠다는 ‘핀테크 오픈 플랫폼’은 또 어떤가. 기업들의 기술 개발 편의를 위해 계좌이체, 잔액조회 등 금융서비스의 프로그램 소스를 온라인상에서 제공한다는 이 정책적 구상은, 은행 입장에선 여태껏 다져온 영업 기반을 ‘공익’을 위해 고스란히 공개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다름 아니다.

금융판 창조경제는 이제 자본시장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다. 한국거래소가 코스피시장과 함께 통합 관할하던 코스닥시장을 자회사로 분리하는 방안이 그 신호탄이다. ‘거래소시장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당국은 코스닥 상장 실적 부진을 거듭 질타하며 중소기업 지원 강화를 위한 거래소 개편이란 점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벤처투자자들의 빠른 자금회수를 도와 창업을 활성화하려는 복안일 것이다. 최경수 한국거래소 이사장 역시 성장 전망이 밝다면 적자회사도 기업공개를 할 수 있도록 상장요건을 완화하겠다며 화답하고 있다. 그러나 벤처ㆍ중소기업 전용 주식시장으로 코넥스를 만든 지 겨우 2년 지나 코스닥 진입 문턱을 낮추려 드는 당국의 조급증은 코스닥 투자 피해자를 양산했던 2000년 벤처 버블 사태의 재연을 우려하게 한다.

금융업 본연의 자금중개 역할을 혁신하겠다는, 그래서 한 경제관료의 말대로 “작은 기업도 잠재력만 있다면 은행 돈을 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당국의 선의를 폄훼할 뜻은 없다. 금융개혁이란 이름으로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는 정책 퍼레이드가 산업계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금융권이 도처의 갈급한 자금수요를 도외시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만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일이 정책이라면 조금 늦더라도 정공법을 쓰는 것이 맞지 않을까. 다생다사한 벤처산업계에서 창업 붐을 일으키고 싶다면 고위험 고수익을 추구하는 모험자본의 활성화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이훈성 경제부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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