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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뚝이 임금님, 떼쟁이 어린이 그리고 대통령

입력
2015.07.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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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우드 글, 돈 우드 그림

어떤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난다. 몇 페이지 안 되는 그림책 중에도 그런 책이 있다. 그런 책은 시간이 흘러도 다시 읽게 된다. 부인이 글을 쓰고 남편이 그림을 그린 ‘그런데 임금님이 꿈쩍도 안 해요!’가 그렇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목욕통에서 도무지 나오지 않아 시중드는 아이를 곤란하게 하는 배불뚝이 임금님이 있다. 기사, 왕비, 공작, 신하들이 차례로 자신만만하게 나서 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게다가 옷을 입은 채로 마지못해 목욕통 속에 들어가, 임금님과 함께 전쟁놀이를 하거나 점심을 먹거나 낚시를 하거나 가면무도회를 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반복되며 점층되는 상황 뒤엔 반전이 기다린다.

처음 읽었을 땐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하는 그림에 감탄했다. 이 기묘한 앙상블이 간단한 줄거리의 뼈대에 풍만한 살집을 입힌다. 목욕통 속 전쟁놀이 장면에선 백 개도 넘는 장난감 병정들이 웅장한 해전을 벌이고, 목욕통 위 수라상은 눈으로 훑기가 아까울 정도로 먹음직스럽다. 수초, 수련, 물고기, 지렁이 무더기가 꿈틀대는 목욕통은 연못을 통째 옮겨온 것 같다.

"오늘은 목욕통에서 전투를 벌이는 거야"라고 하며 기사를 목욕통으로 끌어들인 배불뚝이 임금님.
"오늘은 목욕통에서 전투를 벌이는 거야"라고 하며 기사를 목욕통으로 끌어들인 배불뚝이 임금님.
"오늘은 목욕통에서 점심을 먹자고"라고 하며 왕비님을 목욕통으로 끌어들인 배불뚝이 임금님.
"오늘은 목욕통에서 점심을 먹자고"라고 하며 왕비님을 목욕통으로 끌어들인 배불뚝이 임금님.

중후한 색감의 세밀한 데생이 과장된 표정의 등장인물을 만났다. 임금님이나 신하나 할 것 없이 놀랄 때는 눈썹을 밀어 올리며 입을 타원형으로 모으고, 괴로울 땐 입을 크게 벌리고 콧구멍을 늘린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인물들의 오버액션은 오페라나 뮤지컬의 한 장면 같다. (돈 우드는 생생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가족, 친구를 그림책 속 등장인물로 분장시켜 표정과 몸짓을 연출한 뒤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 시중드는 아이는 돈 우드의 아들이 모델이고, 임금님은 배불뚝이 친구가 모델이다.) 그림책의 그림이라고 얕볼 게 아니다. 눈이 호강한다.

두 번째로 읽게 된 것은 그 며칠 뒤 딸아이를 목욕시킨 후였다. 욕조에서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욕조 안으로 오만 가지 장난감을 끌고 들어오는 딸아이를 보니 배불뚝이 임금님이 떠올랐다. 딸이 이 그림책을 왜 좋아하는지 알았다. 아이들은 자신보다 더 장난스럽고 더 끈질긴 임금님을 보며 대리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시중드는 아이의 곤혹스러운 표정도 떠올랐다. 딸아이를 욕조에서 꺼내려고 전전긍긍하는 내 표정과 닮았다. 욕조에서 안 나오는 떼쟁이 어린이의 부모는 시중드는 아이에게 동병상련을 느낄 것이다.

한참 만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무슨 일에도 꿈쩍 안 하고 자신이 세운 원칙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어떤 분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배불뚝이 임금님이 생각났다. 철부지 배불뚝이 임금님은 기사, 왕비, 공작, 신하들을 다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근엄한 얼굴로 레이스도 페티코트도 축 늘어뜨린 채 물을 뚝뚝 흘리며 목욕통에서 나오는 귀족들은 참 우스웠다.

생쥐처럼 젖어 체면 구긴 채 목욕통에서 나오는 기사.
생쥐처럼 젖어 체면 구긴 채 목욕통에서 나오는 기사.

배불뚝이 임금님처럼 박근혜 대통령도 참 꿈쩍을 안 한다. ‘거부권 사건’은 우유부단한 대표를 위시해 납죽 엎드린 여당 의원들을 우습게 만들었다. 비장하게 쫓겨난 여당 원내대표도 90도로 허리 굽혀 “저희에게 마음 푸시고 마음 열어주시길 기대합니다”라고 사과할 때는 우스웠다. 쫓겨난 원내대표와 보조를 맞췄던 정책위의장이 신임 원내대표 자리에 앉자마자 말을 바꾸며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우습다. 무력한 야당은 더 우스워졌다. 삼권분립을 무너뜨리고 이들을 우습게 만든 대통령 자신은 꿈쩍도 안 한다. 아버지의 그늘에 갇혀 불통과 독선이라는 목욕통에서 나오지 않는다.

목욕물이 든 커다란 물통을 등에 지고 힘겹게 긴 층계를 오르던 시중드는 아이의 얼굴이 다시 보인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면지(겉표지와 본문 사이의 공간)에 먼저 등장하는 시중드는 아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면지(겉표지와 본문 사이의 공간)에 먼저 등장하는 시중드는 아이.

꿈쩍 안 하는 대통령을 모시고 사는 우리의 얼굴을 닮았다. 임금님이 목욕통 속에서 신하들과 실랑이를 하는 동안 시중드는 아이는 끊임없이 일한다. 산더미 같은 물건들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나르고 치우고, 바닥의 물을 닦고 커튼을 걷고 동분서주한다. 귀족들은 시중드는 아이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는커녕 치울 거리만 더 늘린다. 시중드는 아이는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는 목욕통 옆에서 팔을 괴고 생각에 잠기더니, 결국 목욕통의 마개를 뽑아버리고 환한 미소를 짓는다.

마개를 뽑아버리고 웃는 시중드는 아이.
마개를 뽑아버리고 웃는 시중드는 아이.

같은 책이지만 다시 집어들 때 새로운 의미로 읽게 되는 것은 그만큼 그 책이 풍부한 맛을 지녔기 때문이다. 오드리 우드의 글과 돈 우드의 그림은 천진스러운 유머에 곱씹을 만한 풍자를 스스럼없이 버무렸다. 그림책을 갖고 무슨 정치 타령이냐고 타박할 수 있다. 철부지이지만 귀엽게 그려진 배불뚝이 임금님을 왜 억지로 현실의 어떤 인물에 포개어 놓느냐고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의 최종적 의미를 만드는 이는 한 명 한 명의 독자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그림책을 즐겨 읽는 이유다. 이 독자에겐 이런 맛을 저 독자에겐 저런 맛을 보여줄 수 있는 책, 좋지 아니한가.

김소연기자 au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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