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지역잡지·출판인들
"사라져가는 삶과 문화 기록 자부심으로 버티기엔 한계"
어려움 타개 위해 머리 맞대, 플랫폼 구축 지원 요청
수원의 ‘사이다’, 광주의 ‘전라도닷컴’, 대전의 ‘토마토’, 부산의 ‘함께가는예술인’, 서울 홍대 앞의 ‘스트리트 H’, 그리고 제주도의 도서출판 ‘각’. 지역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는 문화잡지이고 출판사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어 생존이 버겁지만 문화 다양성을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작지만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제주에 모여 동지애를 나눴다. 제주민예총과 지역문화잡지연대 주최로 16, 17일 제주대 행정대학원 세미나실에서 열린 ‘지역잡지와 출판 활성화를 위한 제주 컨퍼런스’에서다.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지역출판의 어려움에 함께 대처할 방도를 찾는 자리였다.
모든 것이, 문화는 더더욱 서울 중심인 이 나라에서 지역출판은 사실 “고사상태”다. 컨퍼런스 둘째날 ‘지역출판의 현황과 과제’를 발제한 최낙진 제주대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 출판사의 80%가 서울(62.3%) 등 수도권에 몰려 있다. 출판산업 전체 매출의 85%가 수도권 차지다. 지역출판은 싹 틔우기조차 어렵고, 간신히 세상에 나와도 살아남기 힘든 실정이다. 최 교수는 지역출판을 “세상살이에 대한 지각력이 없는 일부 출판인의 헌신과 오기, 희생으로 운영되는 숙명문화산업”이라고 표현했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다. 지역문화잡지연대만 해도 2012년 출범 당시 멤버였던 인천의 ‘옐로우’는 창간 2년 만인 지난해 결국 문을 닫았다.
최 교수는 지역출판 활성화 방안 몇 가지를 제안했다. 지역출판사들이 온라인, 모바일 등 전자출판 생산과 유통에 참여할 수 있는 정책 지원, 지역출판 도서에 대한 물류비 지원, 지역 공공도서관이 지역출판 도서 구입 의무화, 지역출판물을 소개하는 지역출판전 등이 그것이다.
현재 지역문화잡지연대 회원사는 사이다, 함께가는예술인, 토마토, 전라도닷컴이다. 2000년 인터넷웹진으로 출발해 2002년 종이잡지로 전환한 전라도닷컴이 가장 오래 됐다. 전라도의 사람, 자연, 문화를 전라도 입말로 기록해온 이 잡지는 '민중생활사의 기록', '문화인류학의 보고'라는 평을 들을 만큼 강렬한 토착성으로 유명하다. 소박한 것, 사라져가는 것들을 귀하게 보듬어 왔다. 황풍년 편집장은 “박제된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 오래된 미래가 그 안에 있다”고 말한다.
수원의 ‘사이다’는 골목잡지다. 팔달산 자락의 골목골목을 걸어다니면서 만난 숨은 이야기를 기록해 온 지 3년 됐다. 120년 된 여관의 아흔 살 넘은 주인 할머니 등 주민들의 삶을 기록하고, 잡지가 나오면 동네에서 주민들과 함께 논다.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를 구술 채록해 책으로 내기도 했다.
8월호로 100호를 기록할 토마토는 2007년 창간된 대전의 문화예술잡지다. 북카페를 운영하고 인문학 강좌, 콘서트 등 문화 행사도 하면서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함께가는예술인은 부산민예총이 발행하기 때문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기관 소식지였다가 2012년 대중문화예술잡지로 전환, 개편과 실험을 거듭하며 지속가능성을 모색 중이다. 전라도닷컴과 사이다에 비해 토마토와 함께가는예술인은 형성 중인 현재에 좀더 무게추를 드리우고 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 참가자들은 취재, 편집디자인, 인포그래픽, 실험 등 그간의 노하우를 공유했다. 전자출판에 관심이 많지만, 영세한 지역잡지ㆍ출판사는 여기에 투자할 힘이 없으니 플랫폼 구축을 공공 영역이 지원해줬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특히 스트리트 H가 소개한 인포그래픽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스트리트 H는 매달 홍대 앞 문화지도 최신판을 제작하는 등 이 동네 공간의 생로병사를 기록하며 홍대 앞의 모든 것을 아카이브로 쌓아가고 있다.
지역문화잡지연대 대표를 맡고 있는 황풍년 편집장은 지역출판이 왜 중요하고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했다. “지역은 한국문화의 다양성과 전통문화의 보루이자 생태 환경적 삶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다. 지역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대물림하는 일은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의 삽질에 제동을 걸고 물질만능 시대의 폐해를 극복하는 힘이 될 것이다.”
제주=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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