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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자유의 바다라고? 억압과 착취의 틀로 추락

입력
2015.07.1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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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기계가 만나 활동하는 공간, 자유와 통제 그물코처럼 얽혀

돈과 욕심 넘쳐나는 똥바다로 변해

"진보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굳건한 확신 아닌 미약한 신념"

무질서한 사이버세상에 던진 위안

한 때 인터넷은 공유와 나눔이 있는 자유의 바다처럼 보였지만 이제 돈과 욕심이 넘쳐나는 똥바다로 변화하고 있다. 자유와 통제가 그물코처럼 얽힌 인터넷 세상은 노버트 위너가 제시한 사이버네틱스와 깊은 관련이 있다. 배가 뿔룩 나온 통통한 몸매에 근시 안경을 쓴 그의 사진을 보면 바로크 시대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열한 살에 터프츠 대학에서 학위를 딴 그는 하버드와 코넬 등을 돌아다니며 동물학과 철학, 수학 등 전공을 번갈아 공부했다. 결국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영국과 독일을 돌아다니며 러셀과 힐베르트 등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에게 사사하며 내공을 다듬었다.

천재 수학자들은 일상에서 종종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학회 모임에 참가한 후 위너는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찾지 못했고 심지어 자기 차의 모양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차장의 차가 다 빠져 나가고 난 다음에야 마지막에 남은 자기 자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자동 제어를 통해 목표물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던 수학자의 에피소드치고는 잘 믿기지 않는다.

정보의 정확한 제어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목적물을 정확하게 추적하는 대공 시스템을 고안하던 위너는 말굽 편자 던지기 게임을 하면 엉뚱한 곳으로 말굽편자를 던진 후 몸을 잘 가누지 못할 정도의 ‘몸치’였다. 또한 실험실 작업을 잘 하지 못해 동물학을 포기할 정도로 손 조작이 부실했던 사람이었다. 몸을 잘 쓰지 못하고 원하는 동작을 잘 수행하지 못했던 그의 신체적 특징과 달리 그는 제어를 통해 변화하는 목표물을 추적하는 피드백 시스템을 연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사이버네틱스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사이버네틱스가 적용된 인공물이 사회 전체에 침투하여 사이버스페이스가 일반적 환경이 된 현대 사회에서 1950년대의 위너가 지켜내던 개인주의 휴머니즘은 여전히 유효할까? 사회와 개인의 질서와 진보를 포기하지 않으려던 위너의 시도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경고를 던져줄까.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무너뜨린 ‘사이버네틱스’

그는 2차대전 당시 군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방공망과 관련된 제어 시스템 연구를 진행했지만 전후에는 핵무기 개발을 비롯하여 무기와 관련된 연구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는 인간과 기계가 피드백에 의해 제어되면서 행동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과학의 길을 열면서 통제와 자유라는 두 가지 대립물을 사이버네틱스에서 통합하였다.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인간과 기계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렸다.

그는 인간이나 기계 모두 커뮤니케이션과 제어를 통해 항상성을 유지하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동일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피드백을 통해 항상성을 유지하는 사이버네틱스라는 틀에서 인간은 사이보그가 된다. 인간과 기계가 하나의 동일한 환경 속에서 서로 만나 활동하는 공간이 사이버스페이스이다. 이후 기계와 인간간의 만남은 인터페이스를 통해 현실화되었고 컴퓨터는 인간과 공생하는 인공물로 성장하였다.

위너가 주창한 사이버네틱스는 시스템의 통제와 조절, 제어와 긴밀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이 기계적 제어에서 전기적 제어, 정보적 제어로 발전하면서 그의 사이버네틱스는 폰 노이만의 컴퓨터와 인공지능, 섀넌의 정보이론과 결합하였다. 1950년대에 이들이 이룬 성과는 이후 컴퓨터와 인공지능, 인터넷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조작과 통제의 기술에서 출발한 사이버네틱스는 조작하는 주체와 조작 당하는 객체 사이의 지배와 예속이라는 불평등한 관계를 가져오고 그것은 결국 그의 신조였던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대립된다. 인간과 기계의 공생이라는 틀 속에서 진행되는 기계에 의한 인간의 지배나 체계에 의한 질서와 항상성 추구는 자유주의적 인간의 존재 기반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그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이버네틱스를 통해 허물어지자 인간 주체의 자유 상실이라는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위너 자신은 자신이 갖는 이러한 모순과 사이버네틱스의 이중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이버네틱스와 ‘경직된 기계’를 구분하고 좋은 기계와 나쁜 기계를 윤리적으로 분별하였다. 그러면서도 제국주의의 군사주의나 기술이 갖는 계급성에는 깊게 주목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를 차지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기계와 인간간의 경계선을 무너뜨린 자신의 사이버네틱스 이론과 모순된다.

인터넷 대중화가 안겨준 사이버 휴머니즘

사이버네틱스를 창안한 자유주의자 노버트 위너는 “우리는 비극에 대해 지나치게 무감각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경고했다. 사이버네틱스를 대하는 그의 자세에는 언젠가는 제어력을 빼앗길 지도 모르는 제어하는 자의 불안과 희망이 섞여있다. 그가 추구하던 이성적 자아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적 인간주의는 거꾸로 사이버네틱스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사이버네틱스 기술의 산물인 인공물이 인간의 이성적인 자아를 위협하고 인간을 제어하는 환경이 도래하면 위너의 자유주의적 주체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그가 사이버네틱스라는 용어를 만들고 사이버네틱스가 전자공학에서 신경과학, 사회과학으로 폭넓게 확산되던 1960년대 이후 자유주의적 휴머니즘과 주체에 대한 체제의 위협과 통제는 더욱 커졌다. 1960년대에는 그러한 사회체제에서 벗어나려는 해방운동이 폭넓게 전개되다가 좌절을 경험하는 시대였다.

1990년대 이후 개인용컴퓨터와 인터넷의 대중화로 사이버스페이스는 자유주의적 휴머니즘과 다시 결합하여 사이버스페이스가 자유의 공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이버네틱스는 제어와 통제에서 출발하여 그러한 기능을 더욱 확대하였다. 정보자본의 성장을 통해 사이버스페이스의 이용자는 자유와 활동을 먹고 사는 플랫폼을 통해 철저하게 통제되기에 이르렀다. 이용자 인간은 스스로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자유롭게 갖가지 서비스를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활용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기계들과의 공생 속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체제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있다.

위너가 주저하고 두려워했던 사이버네틱스의 억압적이고 어두운 측면이 일상생활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인터넷 세상은 위너가 사이버네틱스 기계와 반대되는 의미로 말한 ‘경직된 기계’가 되고 있다. 위너는 경직된 기계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적 약탈과 지배를 비판했다. 그는 사이버네틱스에서 경직된 기계가 갖는 특징인 억압, 군사적 규제, 조직, 죽음, 인간을 조직의 부품으로 만드는 것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21세기 사이버네틱스, 무질서와 혼돈

자유주의적 휴머니스트인 위너는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의 인간적 활용을 주장하였다. 그의 저서 ‘인간의 인간적 활용’은 ‘기계의 인간적 활용’이라 바꾸면 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기계가 사회에 미치는 위험성은 기계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기계를 사용하는 인간 때문에 초래된다”는 그의 말은 나이브한 휴머니즘이 갖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새로운 산업혁명인 자동화가 양날의 검이라거나 기술이 가진 사회적 위험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양식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으로 현실에 개입해 들어갈 실마리를 찾아내기는 매우 힘들다. 위너는 “기계의 지배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최후 단계로서의 사회, 즉 임의성은 무시할 만큼 작고 개인들 사이의 통계적 차이는 없는 그런 사회”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아직까지 그러한 상황에 이르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거의 그런 지경에 가까워지고 있다. 사이버네틱스를 발전시키면 발전시킬수록 주체의 보존은 더욱 어려워진다. 안타깝게도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를 지탱하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은 오늘날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순조롭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도 무질서와 혼돈이 깊어가는 21세기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진보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굳건한 확신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미약한 신념이다”라는 그의 말을 위안 삼아 진보의 닻을 내릴 지점이 어딘가를 모색해본다.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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