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 멋모르고 저질러야 비로소 할 수 있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이런 저런 내막을 알고 나면 용감하게 나설 일이 그리 많지 않다. ‘홍시’도 그렇게 시작한 출판사다. 책과 활자를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지적 허함이 꾸준히 보충될 것 같은 얕은 기대감으로 불쑥 출판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이런 불황에 회사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첫 인연은 특별했다.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 부끄럽고 무모한 용기에 비하면 큰 자랑거리로 지금도 신간을 내는 시점마다 판단의 바로미터가 되게 하는 책이다.
옛 일을 회고하는 일은 늘 아련하다. 작은 소품 하나에도 어린 시절이 모두 품긴 것 같은 깊고 진한 향기를 느낀다. 그 중에 옛날 만화책은 더 유별난 데가 있다. 누구라도 어린 시절 만화에 관한 찌릿한 추억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해적판이 넘쳐나던 그때, 불량식품인 냥 어둡던 모습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책의 저자 이명석은 서문에서 문화적 향수의 시대로 회자되는 7080시대 만화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 시절의 만화방은 금지된 쾌락이 숨 쉬고 있는 우리들의 할렘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공을 던지다 흐르는 땀도 닦지 못한 채 달려간 그 곳에 금단의 오아시스가 있었다.”
지금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저급한 시선 때문에 늘 숨어서 함께하던 친구는 어느덧 웹툰으로 세계시장을 휘저으며 문화 창조의 선구자 반열에 올라 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문화의 성장과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일관된 사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강요된 오랜 관습으로부터 너그러워진 것도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즈음에 나온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는 만화 마니아 이명석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시대 변화를 선언하는 선구적 제안이었음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명석은 이 책을 통해서 당시 방대한 일본 만화세계의 실체를 설명한다. 우리가 엄숙한 표정으로 만화를 저질성 매체로 밀어내고 있던 때에 일본은 이미 만화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의 대형 서점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만화책들이 입구부터 산처럼 쌓여있었고 개인소득 전국 10위권에 드는 유명 만화작가도 등장했다고 한다. 저자는 대표 작품 50가지를 골라 이들을 주제별로 분류, 만화의 문화적 편력들을 낱낱이 소개하고 있다. 만화가의 이력과 성향까지 더해서 작품의 질과 장르로서의 작품성, 문화적 가치를 설명한다. 이성적이고 차분하지만 미래파 선언처럼 시대적으로 단호하고 용기 있는 글이다.
만화라는 문화 매체가 음습한 골목에서 밝은 양지로 나와 젊은 작가들의 창조적 문예물이 되는 시대의 변곡점에서 길잡이가 되고자 한 저자의 독보적 결단이 놀라웠다. 그런 역사적 도전을 처음 출발하는 신생 출판사와 함께해준 작가에게 이제 다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홍성택ㆍ도서출판 홍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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