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프랑스 소녀와 독일 고아 소년 2차대전 때 라디오 통해 알다 조우
무명 작가 시절 10년 매달린 장편… 올해 퓰리처상 소설부문에 수상
올해 4월 퓰리처상 수상자가 발표됐을 때 소설 부문의 앤서니 도어란 이름은 다소 생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상작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2002년 활동을 시작한 작가가 겨우 두 번째로 쓴 장편소설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낸 소설집 두 권과 장편소설 한 권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이것이 작가에게 어떤 오기를 발동시켰는지 도어는 2004년부터 10년 간 오직 이 작품 하나에 매달렸고, 2014년 봄에 출간된 소설은 뉴욕타임스와 아마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1년 넘게 내려오지 않았다.
소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마지막 방어기지로 삼았던 프랑스 북서부 생말로 지역을 배경으로, 프랑스 소녀와 독일 소년의 이야기를 그렸다. 여섯 살 때 눈이 먼 소녀 마리로르는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함께 파리에서 살다가 히틀러의 군대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작은 할아버지가 사는 생말로로 피난을 간다. 같은 시기, 독일 탄광도시 졸페라인의 고아원에서 자란 소년 베르너는 기계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 덕에 나치의 군사양성학교 생도로 발탁됐다가 2차 대전에 참전, 생말로까지 흘러 들어온다. 한 도시에 머물게 된 두 사람은 라디오를 통해 상대방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 8월 무너져가는 다락방에서 드디어 조우한다.
2차 대전이라는 흔해빠진 주제가 새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눈을 감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시퍼런 불꽃과 자욱한 연기, 붉고 끈적이는 피와 일그러진 표정. 전쟁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시각효과에 집중하는 대신 작가는 어린 마리로르를 통해 눈을 감는다. 닫힌 눈 뒤에서 열린 세계는 지금껏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 로버트 카파(전쟁 사진가)도 보여주지 못한 2차 대전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스 연료가 윙윙 소리를 내고 달궈지는 금속이 딱딱 소리를 낸다. 얼마 안 있어 따뜻한 수건이 마리로르의 얼굴을 뒤덮는다. 그녀 앞에 시원하고 달콤한 물 단지가 놓인다. 한 모금 한 모금이 축복이다.”
아버지와 함께 발바닥이 찢어지도록 걸어 도착한 작은 할아버지의 집에서 늙은 하녀의 따뜻한 환대는, 실명과 전쟁을 연달아 겪은 어린 소녀가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북돋운다.
대조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얼마나 위험한가. 아버지를 탄광에서 잃은 베르너는 시커먼 석탄 가루가 먼지처럼 내려앉은 마을에서 살다가 나치 고위관리의 집에 라디오를 수리하러 방문한다. 남자의 눈부신 흰 셔츠, 안주인의 털 없는 매끈한 종아리, 설탕가루가 뿌려진 케이크. 라디오를 거뜬히 고쳐낸 베르너에게 남자는 그처럼 “이례적으로 우수한 소년들”만이 갈 수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기서 눈에 박힌 이미지는, 폭력과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잔인한 군사양성학교에서 베르너로 하여금 한 마디의 항명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눈을 감은 것과 실명 상태는 전혀 다를 것이다. 하늘이 있고 얼굴이 있고 건물이 있는 세상 아래 그보다 원초적이고 오래된 세계가 존재한다. 편평한 지표면이 무너지고 여울이 리본을 그리며 허공에 흐르는 소리가 나는 세계다.”
작가는 눈을 굳게 감은 채,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비극의 현장에서 눈을 뜨고 있었던 이가 누구였는지를 묻는다. 인간성이 지표면처럼 붕괴하고 포탄의 쩌렁쩌렁함이 따뜻한 속닥임을 집어 삼키는 동안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던 실명의 시대, 진짜 눈먼 이는 누구였을까.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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