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난 손재주가 별로 없었다. 종이접기를 따라하려고 해도 잘 안 될 때가 많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장면 하나는, 종이로 동그란 공을 접던 것이다. 나는 2차원의 평면이 3차원으로 둥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광경이 신기했다. 나는 차근차근 그 단계를 따라가질 못해서, 접다 만 종이를 들고 벙쪄있었다. 공이 되지 못한 종이는 그냥 여러 번 구긴 쓰레기 같았다. 마법처럼 선생님이 공을 접어주면, 멀뚱멀뚱 그 광경을 마술 보듯 구경했다. 접다 망친 색종이를 던져버리고 선생님한테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완성된 공은 내 차지였다.
‘종이접기 아저씨’는 잊고 지낸지 오래다. 내가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가 거진 20년 만에 인터넷 방송에 나오고야 깨달았다. 지난 12일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인터넷 생방송에 김영만 아저씨가 출연했다. 88년도부터 KBS 1TV ‘TV 유치원 하나둘셋’에서 종이컵에 눈알을 달아 괴물을 만들어주던 그 아저씨. 그 아저씨는 세월이 흘러 눈이 좀 더 작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 때, 난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다. 늦은 시간 집 앞 슈퍼에서 맥주 두 캔을 사고, 감자칩 한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들어와 노트북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잡다한 소식들을 훑어보다가 색종이를 든 아저씨의 사진을 봤다. “우리 친구들, 이제는 어른이죠?” 색종이로 만든 모자를 쓰고 웃는 이 아저씨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나는 늙었다. 말하고나니 이 심각한 고령화 사회에 나보다 더 늙은 분들이 코웃음 치며 혼내겠네 싶다. 그래도 늙었다. 이제 종이접기를 하더라도 색종이가 아니라 포스트잇을, A4 용지를 들고 와야할 것 같다. 요구르트가 아니라 맥주를 들고, TV가 아니라 노트북 앞에 앉은 나. 아저씨는 그 긴 세월 동안 작아진 눈 말고는 별로 달라진 것도 없어 보였다. 풀 뚜껑을 꼼꼼히 닫고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친구들을 격려하는 모습들까지. 아저씨가 그 자리에서 20년 동안 계속 종이를 접어왔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 와중에 아저씨는 종이접기로 얼마나 벌까도 잠깐 생각하긴 했다. 나이 먹으면 남의 지갑 사정에 관심이 많아진다더니 그 말이 진짜인가 보다.
한저녁에 이 종이접기로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행복해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미소가 번졌다. 사소한 행복이 사실 전부다. 나는 교과서에 있는 위인 얼굴마다 수염을 그려 넣고 놀 때 행복했다. 내 옆에서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던 친구도 떠올랐다. 물풀로 거미줄 만들고 논 것도 생각났다. 나는 그 사소한 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공책을 깜지로 만들면서 외웠던 조선시대 정치제도는 거의 다 잊었다. ‘사소함’과 ‘쓸모 없음’이 오히려 더 오래, 깊이 간직될 수 있단 걸 김영만 아저씨는 말해주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 요새 약속을 잡을 때마다 “미안. 야근이 생겼어ㅜㅜ”라고 우는 A양이 하나 있다. A양의 인스타그램엔 얼마 전부터 컬러링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컬러링북이라고 쓰고 색칠 공부 책이라고 읽는다. 어른이 되면 근사하게 말하는 능력만 는다. 무언가에 심하게 빠져있는 사람을 ‘덕후’라고 한다. 나는 20년 째 종이에 풀을 바르고 있는 김영만 아저씨를 보면서 생각했다. 여기, 행복한 덕후가 있다. 나는 그 덕후 바이러스가 더 멀리, 많이 퍼졌으면 좋겠다. 뭐든 좋다. 색칠공부도 좋고, 종이접기도 좋다. 냅킨으로 접은 학이 더 많은 카페 테이블에 오르면 좋겠다. 포스트잇으로 접은 배가 더 많은 책상에 띄워지면 좋겠다. 한 뼘 더 세상이 행복해질 것 같은 기분이다.
내겐 아직, 심야식당은 필요 없다. 나는 어설픈 위로보단 소소한 행복으로 내 삶을 채우는 방식을 더 받아들이고 싶다. 퍽퍽한 삶에 소소한 행복이, 삶 곳곳에 뿌려지길 바란다. 내 친구는 그걸 ‘밤빵에서 밤을 찾는 일’이라고 비유했다. 밤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퍽퍽한 빵이 더 많다. 그래도 그 안에서 밤을 찾아 먹는 게 꽤나 재밌는 일이다. 묵묵한 위로를 주는 마스터보다, 함께 덕질할 색종이 아저씨가 더 반갑다. 색종이 아저씨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 친구들 이제 어른이죠? 어른이 됐으니 이제 잘 할 거예요. 잘 안 되면 어머니께 도와달라고 하세요.”
자, 이제 쉰이 넘으신 어머니와 함께 종이접기를 해보자! 밤빵 같은 우리 삶에 콕콕 밤을 박는다는 심정으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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