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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선한 사람들, 나쁜 판단들

입력
2015.07.17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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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의 파시스트인 비드쿤 크비슬링은 악함, 반역자와 동의어가 됐다. 그가 아내와 함께 살았던 오슬로 외곽의 큰 저택은 홀로코스트와 소수 종교 연구를 위한 노르웨이 센터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올해 초 1814년 제정된 노르웨이 최초 헌법에 관한 전시를 보기 위해 그 센터를 찾았다. 학식 있는 학자들이 만든 헌법은 역사, 법률, 철학을 담은 진보적이면서 깨어 있는 문서였다. 학자 일부는 그리스 고전, 일부는 고대 히브리어에 능통했으며 모두 독일 철학자 칸트와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헌법 가운데 이상한 구절이 있다. “유대인이 구역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금지된다”는 경고를 담은 종교의 자유에 관한 2조였다. 이 조항은 그 당시에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 해 전쟁에서 대패한 나폴레옹은 그가 정복한 국가에서도 유대인 시민의 권리를 보장했다. 덴마크 왕도 해당 조항이 노르웨이 헌법에 삽입되기 전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허락했다.

노르웨이의 1814년 헌법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헌법에 포함된 이유다. 그 구절을 만든 이유는 인종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유대인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고 간주한 것이 아니다. 대신 유대인의 신념과 관습이 문화와 신앙 측면에서 현대적이면서 깨어있는 서구의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간주한 것이었다. 헌법 제정자 가운데 한명인 프레드릭 모츠펠트는 유대인들이 결코 어떤 나라의 사람들과도 어울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도 유대교가 추종자들을 기독교인과 비유대인을 기만하도록 독려한다고 했다. 유대인은 항상 “국가 안의 국가”를 형성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노르웨이 헌법을 제정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다른 국가들에서 오랜 기간 박해 받아온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노르웨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노르웨이의 경우 유대인들을 시민이 되도록 두는 게 최선의 방안이 아니었다. 노르웨이의 히브리 문화 전문가들은 유대교와 노르웨이 헌법이 양립할 수 없다고 봤다. 유대인들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이며 이는 현대 이슬람 비평가들이 이슬람법을 두려워하는 것과 비슷하게 두려움을 갖게 했다.

중요한 이슈는 인종이 아니라 종교였다. 인종과 종교는 쉽게 혼동해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다. 반유대 조항의 주제에 대해 저명한 노르웨이 철학자 하콘 하켓은 “유대인 시민권을 위해 싸운 사람들조차 유대인들을 유대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대목을 두고 무슬림들과 이슬람에 대해 이즈음 쏟아지는 말들과 같은 방식의 지적을 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또한 계몽이란 것이 자주 ‘이슬람화’의 위험에 처한 서구적 가치의 약칭으로 인용된다. 사람들은 지금 또 무슬림들을 향해 국가 안의 국가, 불가능한 동화(同化), 무지한 무슬림들을 그들의 신념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확고한 세속주의자들의 필요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확실히 1814년 당시 유대인들은 오늘날 서구에서 무슬림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폭력적인 지하디즘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노르웨이 헌법의 잘못된 반유대 구절-꼭 지적하고 싶은 건 그것이 불과 수십 년 뒤에 반복되었다는 점이다-에서 얻을 교훈들이 있다. 잘못된 판단은 제대로 된 동기에서도 비롯될 수 있고, (이슬람이나 유대교의)지식은 이 어리석은 생각들에 대한 예방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누군가가 어떤 것을 믿는다고 여겨 그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언제나 어리석다-그리고 매우 위험하다-는 점이다. 모든 무슬림들이 종교적 배경 때문에 똑같이 생각한다-개인적인 생각보다 ‘마인드(공통적인 사고)’를 갖는다-고 여기는 것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 그리고 다른 어떤 종교인 집단의 마음을 안다고 가정하는 것만큼이나 큰 착각이다. 다양하고 때로 모호한 어떤 것인데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믿음이란 확실한 고대의 문구들에 따라 이념적으로 고정된 실체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완전히 오도하는 것이다.

서구에는 코란을 금지하고 무슬림들의 이민을 막는 선동 정치가들이 있다. 그들은 중동에 퍼져있는 테러에 대해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아직 다수는 아니고, 서구가 ‘아랍화’나 ‘이슬람화’의 위험에 있다는 믿음은 아직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요 정치가들도 때로 이유가 정당하다고 해도 1814년 노르웨이 제헌 의회 사람들과 같은 유형의 실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예컨대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정부라면 장려하거나 존중해야 할 사상 표현의 자유를 제약해 이슬람 극단주의를 제압하려 하고 있다. 캐머런 총리는“우리의 가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든 하지 않았든” 처벌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캐머런은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종차별주의자나 편협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폭력적인 극단주의 이념이 확산된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폭력 행위를 처벌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순전히 자신의 믿음을-더 나쁜 건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우리가 믿는 것을-추구하는 사람을 공격하면 마녀사냥이 되어 버린다.

캐머런 총리는 ‘민주주의와 관용’과 같은 주요 가치들이 옳은 것이며 이런 가치들을 지켜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옳다. 하지만 생각을 금지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다른 어떤 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칼리지 교수

번역=고은경기자 ⓒProject Syndicate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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