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자들과 수차례 격돌하며 꾸준히 사업확장 1위 자리 지켜
공중파와 차별화된 방송 콘텐츠 케이블TV 약진 이끌어 내
그룹 매출 17% 주력사업으로 키워

1995년 4월 깜짝 뉴스가 터졌다. 할리우드의 화제의 신생 회사 드림웍스 SKG에 한국 회사가 대주주로 참여한다는 소식이었다. 드림웍스 SKG(이하 드림웍스)는 흥행마법사 스티븐 스필버그와 유명 애니메이션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 음반계의 실력자 데이비드 게펜이 손잡고 만든 회사였다. 세계의 큰손들이 사업 참여를 위해 줄을 서던 엔터테인먼트 기업에 한국 회사가 3억달러를 투자한다니 세간의 시선을 끌 만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드림웍스의 투자 파트너가 제일제당(현 CJ주식회사)이라는 점이었다. 당초 협상파트너로 알려진 것은 삼성전자였다. 스필버그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회동하는 사진까지 외국 언론에 보도됐다. 삼성전자는 6억달러 투자를 제시했으나 스필버그 등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 삼성전자를 제치고 할리우드 거물의 마음을 산 이미경(57) 당시 삼성전자아메리카사 이사가 일약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부회장님’이라는 간단한 호칭만으로도 의미가 통하는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대중에 처음으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20년 영향력 행사한 숨은 실력자
드림웍스 투자 협상 주역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이후 이미경 부회장은 CJ그룹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중심이었다. 그가 제일제당 멀티미디어사업부 이사, CJ엔터테인먼트 사업부 상무, CJ엔터테인먼트 부회장, CJ미디어 부회장을 거치는 동안 설탕기업으로 알려진 제일제당은 영화와 방송, 음악, 극장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고, 20년 사이 식품을 포함해 문화사업까지 아우르는 CJ그룹으로 거듭났다.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사업이 그룹 전체 매출의 19%(2014년 기준)를 차지하며 주력 사업 영역 중 하나로 성장했다. 김병찬 플럭서스뮤직 대표는 “(이 부회장이) 많은 투자와 노력으로 엔터테인먼트업계의 산업화를 선도하고 있다”며 “특히 공중파와 차별화된 방송콘텐츠로 케이블TV의 약진을 이끌어낸 성과가 두드러진다”고 이 부회장의 활동을 평가했다.
국내 엔터테인먼트산업을 쥐락펴락하는 ‘CJ 문화왕국’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이 부회장이 한국일보 선정 엔터테인먼트산업 영향력 6위에 오른 것은 오히려 과소평가된 결과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부회장이 엔터테인먼트 계열사를 아우르는 지주사 CJ E&M이 2011년 출범한 뒤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고, 컨텐츠 생산에 간여하는 경영자라기보다 재벌 3세 오너라는 사실이 저평가에 영향을 미쳤을 만하다. 이 부회장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의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장녀로,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그의 동생이다.
실제로 이 부회장은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경영 스타일을 유지해왔다. 이 부회장은 20년 동안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큰손 대우를 받아 왔으나 사업을 진두 지휘하진 않았다. 공식 행사 참여도 많지 않다. 이 부회장과 만났다는 사람은 업계에서도 소수다. 드림웍스 투자 이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일이 거의 없다. 그래도 한국일보 조사에서 나영석 CJ E&M PD가 3위, 김성수 CJ E&M 대표가 8위, 정태성 CJ E&M 영화부문 대표가 11위에 각각 오른 것은 결국 CJ그룹과 이 부회장의 영향력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해박한 지식과 비전 갖춘 리더”
한 영화인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CJ의 위상은 CJ그룹의 자금력, 재벌 특유의 선단식 경영이 중요했다”고 보지만, CJ가 경쟁자들과 대회전을 여러 차례 치르며 20년 동안 사업을 확장하고 1위 자리를 지켜낸 과정을 돌이켜 보면 이 부회장의 굳건한 의지와 경영 능력이 확인된다. CJ는 1990년대 중반 영화사업에 뛰어들며 삼성전자와 대우, SK 등 국내 대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삼성전자 등이 외환위기(IMF) 이후 시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2000년대 후반까지 오리온과 영화, 방송, 공연 분야에서 일합을 펼쳤다. CJ는 2009년 오리온에서 온미디어를 인수하며 케이블업계 최강자 자리를 차지했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와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제작한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처스 대표는 이 부회장에 대해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미래와 방향, 해외시장 진출 등에 대해 깜짝 놀랄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원 대표는 “무엇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애정이 많다”며 “단기 실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모험적인 투자가 가능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당장의 성과로 인물을 판단하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재를 관리하는 경영 방식도 눈길을 끈다. CJ E&M과 1,000만 영화 ‘해운대’와 ‘국제시장’을 합작해낸 윤제균 감독이 대표적이다. 윤 감독이 2003년 ‘낭만자객’의 흥행 참패 후유증에 시달릴 때 이 부회장으로 지시로 당시 CJ엔터테인먼트가 윤 감독의 제작사 JK필름에 영화 기획개발 지원을 했다. 윤 감독은 “아무도 투자하지 않으려 할 때 CJ가 선뜻 나섰다”며 “단순한 사업 파트너의 모습이 아니라 친한 친척 누가 같은,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실무 차원에서 캐스팅이 어려운 배우들에게 직접 전화해 “우리 작품을 함께 하자”고 챙기기도 한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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