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접봉을 잡은 소년이 있었다. 그 이후로 23년 동안 정말 뼈 빠지게 용접만 잡았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더라. 너무 억울해서 데모를 했더니 업무 방해라고 유치장 살았다. 벌금 물게 됐다. 손해배상 1억 원이다.”
단지 여섯 문장만으로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의 삶이 한 눈에 펼쳐진다. 15일 첫 방송한 KBS2 수목극 ‘어셈블리’의 한 장면이다. 강렬하면서도 절도 있는 이 장면은 부당 해고 노동자의 울분으로 시청자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20년이 넘도록 한 직장에서 성실하게 근무했던 노동자들이 부당해고 앞에서 하루 아침에 실직 신세가 된 채 법정 앞에 서 있게 됐다. 구구절절 한 사연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1심에서 패하고 2심에서 희망을 보았다가 결국 3심에서 회사 편을 드는 판사와 대면했을 때의 허탈함이 더 클 것이다.
TV 드라마에는 첫 도전하는 정재영(진상필)이지만 그의 깊이 있는 연기는 스크린이나 TV에 상관없이 진가를 발휘했다. 힘 없고 ‘빽’ 없는 자들의 억울한 입장을 전할 때 말이다. 특히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며 판사에게 핏대 높여 말할 때의 연기는 더욱 그랬다.
“왜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는 애 달래는 척 하다가 빰 때렸잖아요. 맞은 데 또 때렸잖아요.”
‘어셈블리’에는 노동자만 있는 건 아니다. 취업난에 허덕이며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 채 살아가야 하는 삼포시대를 맞은 20대의 사연도 있다. 지방 사립대 행정학과 출신인 김규환(옥택연)은 노량진 고시촌에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대리기사로 뛴다.
그러나 현실에선 백수인 규환은 “해고가 뭔지나 아느냐”는 상필의 일갈에 발끈하며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그 빌어먹을 해고 한 번 당해보는 게 우리 소원”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청년세대의 암울한 현실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이중성의 대가’ 정치인들의 면모는 또 어떤가. 집권 국민당 재선의원 백도현(장현성)은 과거 자신의 보필하다 지금은 정치 컨설턴트로 있는 후배 최인경(송윤아)에게 공천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위기 상황에 처하자 그야말로 정치적 전략적으로 진필상에게 접근한다. 백도현은 진상필에게 비리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 지역구 국회의원 자리를 제안한다. 여당 후보로 재보궐선거에 나가달라는 것이다. 이를 엿들은 최인경은 백도현의 배신으로 치를 떨었다.
이렇듯 ‘어셈블리’는 서민들의 먹고 사는 시급한 문제, 정치인들의 양육강식 세계 등을 꼬집어 시청자의 눈길을 한 눈에 사로잡았다. 실제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인 정현민 작가의 섬세한 필력이 돋보였다. 이날 방송은 5.2%(닐슨코리아)에 불과했지만 현실적인 상황과 대사로 더욱 관심을 받을 듯 하다. 진상필이 여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는 과정이 벌써부터 들뜬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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