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화면에 등장한 아이에게 학교 친구들은 ‘루저’, ‘뭘 보냐’, ‘쓰레기’라는 말을 건넨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건 아니지만 말 한마디로 아이의 얼굴에 멍 자국이 생긴다. 마지막에 등장한 친구가 ‘안녕’ 인사를 건네면서 주인공 얼굴의 멍 자국이 사라졌다.
14일 오전9시 서울 동대문구 동국대 사범대 부속중학교의 WEE클래스 상담실에 모인 12명의 학생들이 이런 내용의 공익광고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들은 이어 친구에게 듣고 상처가 된 ‘병신, 닥쳐, 찌질’ 같은 단어들로 빈칸을 채워가며 자신이 사용하는 말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배워갔다. 이 학교는 학기를 마무리할 때쯤 2학년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학교폭력예방을 위한 ‘어울림 프로그램’을 2년째 진행해 오고 있는데 이번 학기의 주제는 ‘의사소통’이다.
이날 마지막 순서는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연결 돼 있다’는 이야기에 빗대어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 실타래를 던지며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기훈이는 찬이에게 “수학 숙제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실타래를 받은 찬이는 또 다른 친구에게 “PC방에 같이 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학생들 틈에 있던 이유진(36) 상담교사는 “단순히 PC방에 가서가 아니라 같이 시간을 보내는 친구라서 고맙다는 뜻인 거지?”라며 학생들이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말들을 풀어냈다. 모든 학생들이 실로 연결되면 반대 방향으로 감겼던 실을 다시 풀어가며 고마움을 되돌려 준다. 찬이는 기훈이에게 “다른 친구와 다툴 때 내 편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처음에 장난스런 모습들은 실타래가 되돌아올 때는 진지하게 바뀌어 있었다.
지난해에는 ‘공감’을 주제로 한 역할극을 통해 학교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이해해보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실제로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다는 결과가 나왔다. 2학년 남학생 210명과 축구부 29명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학교생활 만족도가 평균 3.97점에서 4.15점으로 높아졌고 공감능력도 3.41점에서 3.81점으로 높아졌다.
어울림 프로그램은 교육부와 교육개발원에서 개발한 자료지만 동대부중의 프로그램은 사뭇 다르다. 상처가 되는 말들을 써서 친구들과 서로 읽어보거나, 교사가 주제와 연관된 활동들을 직접 엮어 학교 자체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이유진 교사는 “아이들 성향을 파악하고 있는 상담교사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게 외부에서 만든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고 설명했다. 이 교사는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아이들이 조금씩 인지하고 변화해간다는 데 의미가 크다”며 “개인 상담도 병행하면서 학교폭력 예방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어울림 프로그램 운영학교로 선정된 곳은 모두 74곳이다. 이들 중 프로그램 도입 때부터 학교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은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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