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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 녀석의 기억

입력
2015.07.1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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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방 강원도 산골에서 처음 맞은 겨울이었다. 6주간의 사단 신병교육대 훈련을 마치고 하루 외박을 한 다음 날 저녁 우리 54기는 다시 신병교육대로 돌아왔다. 신병교육대로 돌아오기 무섭게 자대로 떠난 병력도 있었지만 대개 하루 이상은 머물며 부대 배치를 기다렸다.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 할 수밖에 없는 두려운 그곳으로 떠나며 우리는 서로 쓸쓸히 손을 낮게 흔들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자대에 배치된 지 겨우 이주일 남짓 되었을 무렵 토요일 저녁이었다. 우리 집에서나 겨우 내가 어느 부대에 배치되었는지를 알 게 되었을 텐데 녀석이 불쑥 나타났다. 180㎝ 가까운 장신에 파란 파카, 청바지, 배낭 등 대학시절 모습 그대로였는데 제대한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아 아직 머리는 짧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다니다 입대했으니 동기들보다 몇 해 늦게 입대한 나를 염려해서였을 게다. 녀석으로서는 최고의 배려를 한 것인데 나는 고마운 마음보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앞섰다. 이번 일로 무슨 사단이나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마침 비상이라 외박은 할 수 없어서 영내 PX에서 만나고 있었는데, 누군가 면회 왔다는 소식이 부대에 퍼졌나 보다. 슬리퍼에 깔깔이라 불리는 누런 야전점퍼 내피만 입은 고참 들이 어슬렁거리며 PX로 들어왔다. 우리 탁자에 놓여 있는 단팥빵과 주스를 힐끗힐끗 보며 말을 섞으려는 그자들을 보자 녀석이 먼저 말했다. “최 하사! 엄 병장! 이리 앉읍시다. 내 제대한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아 당신들 보고 ‘님’ 자는 못 붙이겠소!” 목소리는 예전처럼 높고 컸다.

하사와 병장은 녀석에게 군번을 묻더니 “우리 보다 3개월 이상 앞서니 그럽시다” 하며 못이기는 척 하며 옆 자리에 앉았다. 이 자들은 닭발에 쥐포, 황도, 과자 등 녀석이 시원시원하게 주문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바짝 얼어있는 내 모습을 힐끗 본 녀석이 가방 속의 소주병을 슬쩍 보이자 두 고참의 눈이 빛났다.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는 평소 모습 그대로의 녀석이 고마웠지만 내색조차 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우유로 위장하느라 소주에 우유를 타서 죽죽 들이키는 녀석과 두 고참 앞에 부동자세로 앉아 있던 내 모습은 마치 정지화면처럼 지금도 또렷하다.

소주 됫병 2개를 변변치 못한 안주로 1시간 안에 마셨으니 참으로 급하게도 마셨다. 친구 걱정에 제대한지 1주일 만에 혼자 낯선 곳에 찾아와 고참이라는 자들을 상대하던 녀석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끈하다. 어떻게 비상 걸린 전방 부대 PX에서 술을 먹을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그 시절 군대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었다고 말이다.

근 1년 만에 첫 휴가를 나와 녀석을 만났다. 그날 어떻게 갔느냐고 했더니 부대 위병소를 지나 모퉁이로 꺾어지자마자 모조리 토하고 구르다시피 여관에 들어가서 다음날 오후까지 뻗어있었다며 씩 웃었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돌아간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도 마침내 제대하고 복학하니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아니 내가 조화를 이루기 힘들었다는 것이 옳다. 어쨌든 위태롭게나마 세상에 적응해가며 살다 보니 녀석과의 만남은 손에 꼽을 만했다.

그러다 지천명을 넘은 지금, 녀석이 일자리를 찾아 베트남으로 떠난다는 말을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본다. 나는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 적이 있었던가. 어스름한 새벽 짙은 안개 속에 시야가 막혀 홀로 방황할 때 손을 건네준 그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경험을 한 번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당나라의 시인 왕발이 당시의 관념으로는 세상 끝과도 같은 먼 곳인 사천으로 부임해 가는 친구를 배웅하며 쓴 시 가운데 “이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있다면, 하늘 저편 끝도 바로 곁인 듯하리니(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가 떠오른다. 친구여 몸조심 하게나.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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