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 인종주의자로 묘사
작가의 55년 전 원고 복사본 받아
고친 흔적 없어 애초 3부작 계획
인종차별주의자로의 변절인가, 고뇌하는 현실의 인물인가. ‘앵무새 죽이기’ 이후 55년 만에 출간된 하퍼 리(89)의 신작 ‘파수꾼’이 출간을 앞두고 충격과 논란에 휩싸였다. 위험을 무릅쓴 영웅적 변호사 애티커스가 전작과 달리 인종차별주의자로 묘사(본보 13일자 24면)된 내용이 알려지면서다. 한국 판권을 따낸 열린책들은 14일 전세계 10개국 동시출간을 맞아 기자간담회를 갖고 보다 상세한 내용을 공개했다. 번역자 공진호씨는 “애티커스가 변절했다기보다 캐릭터가 명확해진 것”이라며 오히려 당대 미국의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파수꾼’은 내용 상 ‘앵무새…’의 속편이지만 집필 시기는 앞선, ‘앵무새…’의 모태다. 1930년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앵무새…’에서 여섯 살이었던 스카웃은 ‘파수꾼’에서 스물여섯 살 성인으로 자라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 주변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흑인 소년을 변호했던 아버지 애티커스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스카웃은, 아버지가 흑인을 차별하는 주민협의회의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휩싸인다. 따져 묻는 딸을 향해 아버지는 흑인은 시민의 신분에 따르는 책임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며 그들에게 평등한 권리가 주어지면 백인들이 피해를 입을 거라고 말한다.
“저울이 반대쪽으로 기울면 어떻게 될까? 군(郡)에 완전한 등기소를 유지할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니그로가 투표로 백인을 서서히 밀어내면 결국 군청의 모든 지국에 니그로가 들어가 있을 테니까.”
뉴욕타임스 등 영미권 언론은 ‘영웅의 타락’이라며 큰 실망감을 표했다. 하지만 번역자 공진호씨는 “정의롭던 사람이 변했다기보다는 모호했던 애티커스의 캐릭터가 명확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이의 눈에 마냥 크게만 보였던 애티커스도 실은 기득권자의 한 사람으로, 흑인 소년을 변호하면서 숱한 고뇌에 휩싸였으며 그것이 ‘앵무새…’에서 이중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공씨는 “‘앵무새…’가 ‘파수꾼’을 모태로 쓰인 소설이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로 ‘앵무새…’를 다시 읽게 만든다”며 “아마도 전세계 평론가들이 바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씨는 일체의 내용 발설이 금지됐던 지난 두 달 간의 작업 과정도 공개했다. 한국에 건네진 ‘파수꾼’ 원고는 딱 한 부였는데, 하퍼 리가 55년 전 타이핑한 원고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었다. 리는 원고를 고치지도 않았다. 공씨는 “작가가 고령이라 원고를 새로 쓸 여력이 없는 것 같다”며 “다만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저작권사에 메일을 보냈는데 일부는 작가로부터 직접 답을 받아 전달해 주었다”고 말했다. 2월 출간이 결정됐을 때 노령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작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출판이 강행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었는데 이런 의혹이 사실과 다르다는 뜻이다.
두 책이 아귀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다. 흑인 소년 로빈슨의 재판 결과가 ‘앵무새…’에서는 유죄로 나오지만 ‘파수꾼’에서는 무죄로 회상된다. 공씨가 하퍼 리의 변호사로부터 받은 메일에 따르면 작가는 ‘앵무새…’ 이후 소설을 하나 더 쓰고 ‘파수꾼’을 출간해 총 3부작을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앵무새…’의 지나친 성공이 작가를 은둔하게 만들었고 ‘파수꾼’은 작가의 최초이자 최후의 작품이 됐다. 공씨는 “계획대로 됐다면 두 책의 사소한 불일치는 없었겠지만, 대신 작가의 팔팔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지금의 ‘파수꾼’은 없었을 것”이라며 “‘파수꾼’은 편집자들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은 하퍼 리의 순수한 작품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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