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를 00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할 때 ‘빌어’가 맞나요? ‘빌려’가 맞나요? 엊그제 어느 직장인으로부터 문의 전화를 받았다. ‘빌려’로 쓰는 게 맞다고 답했더니 “저도 그런 줄 알고 있는데, 사장님이 자꾸 ‘빌어’로 써야 한다고 하시네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떤 사정일지 짐작이 간다. 아마도 사장님은 적어도 50세는 넘으신, 연세가 지긋한 분이실 게다. 1988년에 표준어 규정의 개정으로 이 표현은 ‘빌어’에서 ‘빌려’로 바뀌었다.
‘빌리다’는 남의 돈이나 물건을 나중에 돌려주기로 하고 얼마 동안 가져다 쓰는 일을 뜻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빌려오기도 하고 남에게 빌려줄 수도 있다. 1988년 이전에는 빌려오는 것은 ‘빌다’로, 빌려주는 것은 ‘빌리다’로 구분해서 쓰도록 하였다. 즉 ‘친구가 나에게 책을 빌렸다’는 친구가 내 책을 빌려갔다는 뜻이고, 내가 빌렸을 때는 ‘친구에게 책을 빌었다’ 또는 ‘빌어왔다’라고 표현해야 했다. 그러나 차차 이 둘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빌려가다, 빌려오다, 빌려주다’로 구분해서 사용함에 따라 ‘빌다’와 ‘빌리다’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 ‘빌리다’로 쓰도록 했다. 그러니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립니다’로 쓰면 된다.
다만 ‘빌려오다’의 의미로 ‘빌다’를 더 이상 쓰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말은 굳어진 표현으로 강하게 인식하고 있어 ‘빌어’가 맞는 것으로 종종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빌다’는 ‘빌어먹다’에서처럼 ‘구걸하다’의 의미나 ‘소원이나 용서를 빌다’처럼 간곡히 청하는 행위를 나타낼 때에만 사용한다. 앞으로는 이 말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이 자리를 ‘빌려’ 간곡히 부탁드린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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