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 가는 한국의 성장동력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성장동력은 이제 아이디어에서 나온다. 아이디어의 총화인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미국은 왜 세계 최강이 되었을까? 미국 벨연구소 연구자의 답은 의외로 ‘토론’이었다. 자유롭게 의견을 내어 최고의 대안이 선택되고 보상 받는 시스템이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소프트웨어가 급성장한 중국의 조직문화도 우리보다 훨씬 수평적이지 않던가. 노동과 자본의 동원이 중시되는 개발 초기에는 수직 명령체계가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생산성이 중시되는 시대엔 수평사회가 답이다. 그래야 창의와 아이디어가 넘치게 된다. 1960년대까지 승승장구하던 공산권이 몰락한 것도 수직 명령경제의 숙명이었다. 수평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첫째, 수평사회에는 자율과 분권이 있다. 개인과 기관이 공식적인 절차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행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선 비공식 절차를 통해 힘센 자가 약자를 암묵적으로 통제한다. 정부와 산하기관 관계가 대표적이다. 정부가 공기업이 원치 않는 일을 시킬 때 계약을 통하지 않는다. 암묵적 압력으로 해결한다. 공기업 사장을 추천하는 임원추천위원회는 권한행사를 못하고 권력기관의 ‘내정’을 뒷받침한다. 공기업 상임이사는 사장이 임명토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주무 부처의 뜻이 결정적이다. 영국에선 성공한 책임운영기관 제도가 우리에 뿌리 내리지 못한 것도 주무 부처의 암묵적인 통제 탓이다. 국책연구소가 대정부 비판을 꺼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앙정부와 지자체 관계도 수평적이지 않다. 국토부 업무 중 가장 흔한 것은 지자체의 질의에 회신하는 일이다. 중앙이 시키는 일이 태반인 지자체에 창의가 깃들겠는가? 민간도 마찬가지여서 대기업과 하청기업도 수평 계약관계가 아니라 상하관계로 인식된다. 하긴 대통령과 국회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의 여당 원내총무 사퇴도 청와대의 암묵적 영향력이 결정한 사례이다. 각 주체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자율과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수평사회의 시작이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역시 컨트롤타워 부재보다 현장의 권한 부재, 대응 미숙이 더 큰 문제였다.
둘째, 수평사회는 종합적 의사결정을 필요로 한다. 다양한 주체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청와대에서도 중요 정책일수록 소관 수석만이 아니라 다른 수석의 의견이 종합되고 다양한 부작용이 지적되어야 한다. 소프트웨어 출시를 앞둔 실리콘밸리의 기업은 그렇게 한다. 수석이 차를 타고 대통령 집무실로 가는 구조에서 그런 격의 없는 토론은 어렵다. 참고로 미국 대통령 집무실은 바로 보좌진과 연결되어 있고 문이 네 개이다.
한편 한국 국무회의에서 토론이 사라진 지 오래이다. 인터넷에서 ‘국무회의 격론’을 검색하면 김대중 대통령 시절 기사가 뜬다. 국무위원들은 타 부처 안건에 여간 해서는 발언하지 않는다. 더구나 부처간 협업을 강조하다 보니 부처 갈등을 협업 부족으로 오해하는 분위기가 있다. 기관의 목표가 다르면 갈등은 당연하며 그 이견 조정을 위해 국무회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무조건 ‘협업’ 하라고 하면 부처 갈등을 빚는 개혁안은 국무회의에 상정되지 못한다. 변화도 물 건너 간다.
부처 내 의사결정에도 종합적 시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토론의 장은 간부들이 서울과 세종시를 오가면서 아예 어려워졌다. 세종시로 이전한 부처는 장관 주재 실장급 회의를 매주는 고사하고 한 달에 한번이라도 하는지 의문이다. 국장이 과장들, 사무관들과 머리를 맞댄 토론으로 부서 입장을 정하고 이것을 장관 주재 실장급 토론을 거쳐 부처 의견으로 확정하는 것이 수평 부처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수평 내각, 수평 청와대를 기대한다. 분권화된 주체가 자유토론으로 최선을 도출하는 수평사회는 창조경제의 핵심 인프라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힘을 가진 주체가 힘을 놓는 데서 시작한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이다.
박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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