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193경기 선발 출전이
개인적으론 700경기보다 의미
스포츠가 주는 배움ㆍ즐거움 덕
아들 삼형제 축구하는 거 안 말려
‘내 뒤에 공은 없다.’
골키퍼 김병지(45ㆍ전남드래곤즈)가 20여년 넘게 지켜온 좌우명이다. 1992년 현대에서 데뷔한 김병지는 올 시즌까지 무려 24시즌을 쉼없이 달려왔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4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감독 자리를 꿰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나이에 국내 최고령 선수로 여전히 그라운드를 지키고 있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에서 함께 뛰었던 황선홍(47) 포항 스틸러스 감독, 윤정환(42) 울산 현대 감독 등 현역시절을 함께한 동료들은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김병지는 여전히 “언제 은퇴할 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12일 개인 통산 699번째 경기를 치른 김병지는 이달 말 전남드래곤즈의 홈경기장인 광주축구전용구장에서 700번째로 골키퍼 장갑을 낀다. 그는 특히 K리그 최초의 골키퍼 득점자이자 골키퍼로서는 3골을 넣은 이력도 갖고 있다. 축구계 안팎에서는 그를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부르는데 전혀 이의를 달지 않는다. 팀은 그런 ‘전설’을 위해 700경기 출장 기념 한정판 유니폼을 준비했다.
-700경기를 앞둔 심정이 남다를 것 같다.
“그리 특별하진 않다. 물론 500경기 기록을 세웠을 때는 ‘숫자가 중요하구나’느끼기도 했다. K리그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수들이 마찬가지겠지만 기록보다는 선수 생활 과정에 의미를 찾는다. 700경기는 언제든 채울 수 있는 숫자다.”
-2012년 자신의 트위터에 ‘술을 21년간 마시지 않고, 담배를 21년간 피우지 않고, 몸무게를 21년간 1kg 이상 변화 없이 관리했더니 21년간 K리그서 살아남았다’라는 글을 올렸다. 프로 24년차인 지금도 변함이 없나.
“그렇다. 오히려 젊었을 때가 적응하기 힘들었지, 지금은 힘들지 않다. 젊을 땐 휴가 기간도 많았고 시즌이 끝나고 나면 술자리도 많았다. 하지만 아마 평생 먹은 술이 소주 한 병이 안될 거다. 맥주로 치면 두 병이 안될 것 같다.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주류공장 다 망했을 것 같다(웃음). 지금은 내가 모두 술을 안 하는 걸 알기 때문에 이해해 준다. 선수에게 축구 경기도 중요하지만 술, 담배 통해서 스트레스도 풀 수 있다. 나쁜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동료들과 관계 맺는 일도 포함돼 있다. 다만 나는 그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 뿐이다.”
-선수생활 내내 다이어트를 해온 셈인데,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있지 않았나.
“몸무게는 프로 생활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하다. 경기력, 컨디션 등 생리학적으로 모두 연결돼 있다. 잠 들기 전에 항상 체중계에 올라간다. 그리고 다음날 훈련 프로그램과 식단 계획을 세운다.”
-K리그의 ‘전설’혹은 ‘기록 제조기’로 불리고 있다. 숱한 기록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는다면.
“한번도 쉬지 않고 연속 193경기를 선발 출전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기록이다. 만 5년 동안(2003~08년) 연속 스타팅으로 나선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700경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700경기는 언젠가 깨지겠지만 이 기록은 깨지기 힘들 것 같다.”
-선수 생활 중 최대 라이벌은 역시 이운재였나.
“이운재를 라이벌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편이다. 스피드, 순발력 등 젊은 시절의 내가 훨씬 더 좋은 선수였다. 또 내가 지금까지 현역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디어나 축구팬들이 라이벌 관계를 부각시키는 것 같다. 지금까지 시대별로 많은 경쟁자들을 만났다. 이운재는 그 선수들 중 한 명이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의 경쟁 구도가 지금 젊은 팬들이 기억하는 모습인 것 같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시절 스스로를 뒤에서 묵묵히 희생하는 ‘소금’같은 선수라고 표현한 적 있다. 지금의 김병지는 어떤 모습인가.
“축구는 주로 선박에 비교된다. 우리 팀의 선장은 노상래 감독이고 우리는 ‘노상래호’다. 나는 선장 밑의 기관장 정도 되는 것 같다. 젊을 때는 혼자만 잘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아무리 잘해도 팀이 못하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런 위치에 선 지 10년이 넘었다.”
-자신의 전성기 시절은 언제로 보고 있나.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지금까지 평균 실점률은 1.06 정도로 거의 일정하다. 상위팀에 있건 하위팀에 있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더 과감한 선택을 했을 것 같다. 그때는 시대를 잘 몰랐다. 국내 분위기상 선수가 해외 진출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해외 진출을 위한 통로도 많지 않았다.”
-가장 위기였던 때를 꼽는다면.
“2008년 허리 수술 했을 때가 위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워낙 어려운 청소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면 프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천운이다. 어릴 때는 키가 크지 않아서 축구를 할 수가 없었다. 2년 동안 공부만 했다. 나중에는 20㎝가 자라면서 부산 ‘소년의 집’에서 골키퍼로 뛸 수 있었다.”
-이번 시즌 40대 감독들이 많아졌다. 2002년 월드컵때 같이 뛰었던 동료들이 지도자가 됐는데, 느낌이 어떤가.
“많은 사람들이 선수 생활을 일찍 접고 감독했으면 괜찮지 않았겠느냐고 묻는다. 나도 주변사람들 특히, 선후배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내년에도 선수로 뛰어야 할 까라고. 하지만 결국 결론은 마찬가지다. 지도자는 은퇴하면 언제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수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K리그의 쇠락을 전부 목격했다. 최근 수원 정대세와 에닝요 등 전북의 용병들도 팀을 떠나고 있다. 전북의 이동국은 어린이날 야구 중계만 하는 방송사를 탓하기도 했다.
“결국 축구인들이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인기 있는 스포츠로 거듭나는 수밖에는 없다. 프로축구가 재미있으면 중복 중계를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이다.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축구 선수를 캐스팅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동국 선수와 나의 견해는 조금 달랐다. 팬들이 사랑할 수 있는 스포츠가 되어야 한다.”
-축구 이외에 좋아하는 종목은 무엇인가.
“스포츠가 주는 철학과 배움을 좋아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고, 팀에 녹아 들지 않으면 안 되고, 경쟁하려면 규율을 지켜야 하는 스포츠가 좋다.”
-아들 셋(태백, 산, 태산)도 모두 축구를 한다. 다른 진로는 권하지 않았나.
“앞서 말했듯 스포츠가 주는 배움과 즐거움을 좋아한다. 아이들을 말리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초등학생인 막내 아들 태산은 축구와 야구를 둘 다 하고 있다. 첫 째 태백은 고1이기 때문에 본인이 잘하기만 하면 곧 프로 데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큰 아들과 함께 현역으로 뛰는 날을 기대해도 될까.
“내 희망이긴 하지만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고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을 것이다. 축구는 체력 소모가 굉장히 큰 종목이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현역으로 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은퇴는 777경기째를 목표로 잡고 있나.
“이제까지 선수로서 목표를 8번 정도 바꿨다. 처음에는 프로팀에 가는 것, 프로팀에 가서 2억원을 모으는 것, 주전 선수로 나서는 것, 국가대표가 되는 것,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 500경기ㆍ600경기ㆍ700경기를 채우는 것 등등. 한 번 목표를 이뤄보니까 목표를 달성하는 요령도 생겼다. 하지만 목표에 한계치를 두지는 않으려고 한다. 은퇴는 올 시즌이 끝나고 할 수도 있고, 1~2년 정도 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향성만 갖고 있다. 기왕이면 행운의 숫자가 세 개 겹치는 777경기에서 은퇴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세 아들도 주변 친구들로부터 ‘너희 아빠 은퇴하시니?’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고 말한다. 그럴때마다 ‘아니’라고 대답한다고 말하더라.”
-프로 생활 24년동안 특별히 아끼는 애장품이 있다면.
“신의손(당시 FC서울 소속)이 보유하고 있던 K리그 최고령 출장기록을 깬 날 기념으로 입었던 유니폼과 끼었던 장갑이다. 2014년 11월 22일이었고 상대는 상주 상무였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내 기록보다는 팀이 이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우리 팀은 3-1로 승리했다.”
광양=이현주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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