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저녁 서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법 굵은 빗줄기였다. 서둘러 집으로 내달아 베란다 창문을 있는 대로 열었다. 밤을 새서라도 온몸으로 모처럼의 비를 느껴보고 싶었다. 빗방울이 마른 땅을 때리는 순간 메케하게 피어 올랐다가 물기에 달짝지근하게 젖는 흙먼지 냄새, 건조한 대기를 떠돌다 습기를 머금어 비로소 코 점막에 와 닿는 비릿한 풀 냄새, 방충망에 부딪쳐 잘게 부서지는 물방울의 부드러운 촉감, 바람과 비가 뒤엉킨 ‘비결정질(非結晶質) 소리’가 간절했다.
▦ 기대는 이내 물거품이 됐다. 금세 빗줄기가 가늘고 성글어졌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빗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 모양이라 실망해 잠을 청했다가 쏴하는 환청에 놀라 깨어 베란다로 달려나가곤 했다. 밤잠을 설치고 일어난 12일에도 종일 비가 내렸다. 워낙 빗줄기가 가늘어 오랜 가뭄과 ‘마른 장마’에 시달려온 중부지역의 갈증을 풀어주기에는 한참 모자랐지만, 언제 비가 이리 반가웠을까 싶은 단비였다. 낮 최고기온이 35도까지 치솟고 열대야까지 동반한 무더위를 식혀준 것만도 고맙다.
▦ 이번 비는 전국적 강우로는 사실상 올 여름 처음이다. 장마전선이 아니라 태풍에 실려온 비여서 더욱 이채롭다. 애초의 기상청 예보대로 9호 태풍 ‘찬홈(Chan-Hom)’이 장마전선을 밀어 올렸다면, 훨씬 많은 비를 뿌릴 만했다. 그러나 남부에 머물던 장마전선은 옆구리가 터지듯 끊어져 왼쪽은 지리멸렬해지고, 오른쪽만 일본 열도로 멀리 떠밀렸다. 찬홈에 실려온 고온ㆍ다습한 대기가 아니었다면 중부지방 상공의 비구름은 기대할 수 없었다.
▦ 찬홈에 이어 11호 태풍 ‘낭카(Nangka)’도 비를 날라온다고 한다. ‘사라’나 ‘셀마’ ‘매미’처럼 강풍과 폭우로 대지를 거칠게 할퀴는 ‘나쁜 태풍’의 기억에 비추면 이례적으로 ‘착한 태풍’이다. 그러나 과거의 광포한 태풍도 대기를 뒤섞어 열을 고르게 하고, 바닷물을 뒤흔들어 정화하는 등의 순기능을 잃은 적이 없다. 중부지역과는 딴판으로 하루 1,000㎜ 이상의 폭우에 시달린 제주에는 찬홈조차 ‘나쁜 태풍’일 뿐이다. 하늘의 성글고도 촘촘한 질서는 늘 그대로이되, 인심만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법이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