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프라하의 봄' 철저한 스탈린식 통치 속에
'2000어 선언' 써 개혁 촉구, 체코 시민들은 희망에 들떠
다시 공산독재, 기나긴 빙하기
1989년 벨벳혁명 이후 동지였던 하벨은 대통령으로
많은 동료 정권 참여와는 달리 전과 다름없이 글쓰기로 여생
루드비크 바출리크(Ludvik Vaculik)는 옛 체코슬로바키아(현 체코공화국, 이하 체코)의 반체제 지식인이자 활동가다. 1946년 5월 총선에서 체코 공산당이 제1당이 된 이래 89년 이른바 벨벳혁명으로 당 독재가 와해되기까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는 당과 국가관료기구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옹호했던 주요 사건의 주역이었다. 그는 동지였던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이 되고 동지들이 너나없이 현실 정치 전면에 나설 때에도 제 자리를 지켰다. 그는 작가 겸 저널리스트였고, 지하출판인이었다. 그는 많은 글을 썼고 수많은 작가들을 서방에 알렸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는 굼떴다. 친구들, 예컨대 밀란 쿤데라가 세계적 명성을 얻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그대로 지하 출판인이었다.
냉전기 그의 조국 체코는 동유럽 국가 중에서도 스탈린식 통치가 가장 철저히 집행된 국가였다. 흐루시초프 집권 이후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초ㆍ중반에도 체코의 스탈린식 강압통치(감금, 고문, 추방, 출당 등)는 강고했다. 68년 ‘프라하의 봄’과 두브체크의 개혁 시도가 있었지만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고, 소련의 군사 개입으로 69년 4월 두브체크가 실각한 뒤 집권한 강경파 구스타프 후사크(Gustav Husak)는 더 견고한 일당독재를 유지했다. 폴란드가 바웬사의 자유노조 운동으로 들썩일 때도, 헝가리가 다양한 경제 실험으로 개혁을 추진할 때도, 체코는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가장 철저히 억압한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동유럽 탈사회주의 체제개혁의 정치경제학’ 진승권 저, 서울대출판부) 소련에게 체코는 독일과 국경을 맞댄 지정학적 방패였고, 당연히 동맹국(이라 불리던 위성국) 중에서도 전략적 관리 대상이었다.
‘프라하의 봄’은 스탈린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체코의 개혁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응답이었다. 계획경제가 한계상황에 이르면서 인민들의 삶도 팍팍해지던 때였다. “63년 2월 경제학자 셀루츠키(Selucky)는 중앙계획경제의 효율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계획의 우상화’를 ‘개인의 우상화’로 빗대어 계획경제와 스탈린주의를 동시에 공격했다. 같은 해 11월 한 경제세미나에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개선책으로 시장경제원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체코의 역사’ 김장수 지음, 이담) 프라하의 봄은 그 무렵부터 징후를 보였지만, 현실로 나타난 것은 두브체크 이후였다. 두브체크 체제 하에서 숙청된 정치인들이 부분적으로 복권되고, 검열이 줄었다.
바출리크가 장편소설‘The Axe 도끼’를 발표한 건 66년이었다. 집단주의체제 하에서 권력에 맞선 인민들의 저항을 거칠고 냉소적인 어조로 그린 소설(알라딘 서평 참조)로, ‘도끼’는 집단농장 농민들이 관료에 대항해 들었던, 저항의 환유라고 한다. “무자비하고 어둡고 위협적인 분위기 때문에 욕지기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책이 그 당시 체코 국내에서 출간된 게 기적 같다”고 쓴 한 서평으로 미루어, 작품의 어조(40세이던 바출리크의 어조)가 꽤나 격했던 듯하다.
한 해 뒤인 67년 6월, 체코작가동맹 4차회의에 참석한 바출리크는 연단에 올라 일당독재와 억압적 문화정책을 거칠게 비판한다. 유화국면이라고는 하나 강경파 안토닌 노보트니가 당과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하벨은 ‘Disturbing the Peace(1990)’란 책에 “참가 작가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는데 바출리크가 자신들이 털어놓고 싶던 진심(진실)을 대신 말해줘서 후련하다는 부류와 중앙권력의 보복을 염려하며 기쁨을 억제하는 부류가 있었다”라고 썼다. 당시 작가동맹 회장이던 헨드리흐(J.Hendrych)가 작가들의 자유주의적 성향에 젖어 당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했다고 비판하자 쿤데라가 헨드리흐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도 그 회의에서였다. 노보트니는 68년 3월 실각했고, 뒤를 이은 게 두브체크였다.
그 해 6월 27일 ‘2,000어 선언’이 발표된다. 바출리크가 작성하고 지식인 70명이 서명한 ‘선언’은 소비에트 체제 내의 온건한 개혁을 지향하던 두브체크에게 보다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었다.
“(…) 이제 대다수 인민은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잃었고, 각자와 각자의 돈만 신경 쓸 뿐이다.(…) 인민들의 유대는 훼손됐고, 더 이상 노동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당의 지배 하에서) 우리의 정신과 체질은 회복될 수 없을 지경으로 망가져왔다.”
저 진단 위에서 ‘선언’은 권력을 독점ㆍ오용해온 강성 보수 정치인 퇴출을 요구했고,국내 개혁 정책이 ‘외세’의 개입을 초래할 가능성을 염려하며 “어떤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썼다. ‘외세(foreign forces)’란 바르샤바조약기구(WTO), 즉 브레즈네프 체제의 모스크바였다.
‘2000어 선언’은 프라하의 봄의 절정을 알리는 불꽃처럼 체코 인민들을 들뜨게 했다. 너무 들뜬 나머지 며칠 뒤 두브체크가 TV에 나와 시민들의 진정과 단합을 호소했을 정도였다. 반면 국경 너머의 분위기는 판이했다. 2주 뒤 모스크바의 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에는 “자유와 민주화라는 미명하에 48년 이래 체코의 역사를 부정하고, 당의 역할과 조약국간의 유대를 능멸”함으로써 “반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글”이라는 한 작가(I.Aleksandrov)의 ‘선언’ 비판문이 실린다. 사실상 소련공산당 지도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바르샤바조약군이 프라하 중앙광장(현 바츨라프광장)에 진을 친 것은 ‘선언’이 발표된 지 두 달도 안 된 8월 20일이었다. 짧은 봄은 그렇게 졌고 69년 1월 프라하 카렐대 철학부 학생이던 얀 팔라치(J.Palach)가 분신 자살하고 자이츠(J. Zajic)와 플로체크(F.Plocek)가 뒤를 잇는다. 두브체크는 실각했고, 정치적 다원주의와 부분적 시장경제라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도 30년 뒤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후사크의 소위 ‘정상화’작업은 바출리크가 개혁 가속화를 요구하며 경고했던 ‘반개혁의 보복’예상을 능가했다. 69~71년 사이 전체 공산당원 네 명중 한 명(약 50만 명)이 축출됐고, 군 지도부 17%와 경찰 간부 30%가 교체됐다. 바출리크도 당적은 물론 작가동맹에서도 제명당했고, 모든 작품 활동이 금지됐다. 바출리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The Guinea Pigs(1970) 기니피그’는 프라하의 봄 직후에 비밀리에 출판된 작품인데, 거기서 작가의 어조는 모호해지고 내용도 알레고리적으로 우회한다고 한다.
벨벳혁명 전까지의 긴 정치 빙하기 동안 바출리크는 비밀경찰의 감시를 피해 지하출판인으로, 반정부ㆍ반체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73~79년 ‘에디체 페틀리체(Edition Padlock)’라는 이름으로 내기 시작한 반체제 작가들의 지하출판 시리즈는 100여 권에 이르고, 그 중 다수는 서방에서 번역 출간됐다.
프라하의 봄 이후 가장 두드러진 저항운동이 1977년의 소위 ‘77 헌장(Charter 77)’사건이다. 하벨과 바출리크, 극작가 겸 배우 파벨 렌도브프스키(2014년 작고)가 초안을 쓴 ‘헌장’은 체코 헌법과 헬싱키 협약에 따른 소박한 인권 보장 요구였다. 세 주역은 지식인과 종교인 등 243명이 서명한 ‘헌장’을 당과 정부에 발송하고 공식 선포할 계획이었지만 1월 6일 비밀경찰에 발각돼 연행된다. ‘77헌장’사건이 체코 시민들에게 알려진 것은 미국과 유럽 일부 언론보도와 ‘Radio Free Europe’ ‘Voice of America’ 등 방송 덕이 컸지만, 당과 정부의 역선전 덕도 있었다. 당은 헌장의 내용은 철저히 통제하면서 “반 정부, 반 사회주의 선동의 글”이라는 비판을 연일 보도됐다. 어용 지식인들의 ‘반(反) 77 헌장’도 나왔다.
보복과 탄압도 뒤따랐다. 주모자와 서명자들에 대한 모진 심문과 가택연금, 압수 수색, 해고와 감금이 이어졌고, 자녀를 퇴학시켜 교육기회를 박탈하거나 운전면허를 취소하는 야비한 보복도 있었다고 한다. 하벨은 5년형을 선고 받았다.
‘77 헌장’사건이 체코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한 데는 시작도 하기 전에 진압당한 탓도 있지만, 체제 내에서의 권리 요구 즉 “법에 따라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해달라”는, 너무나 미온적인 요구를 담은 탓이라는 비판이 있다. 77년의 체코(뿐 아니라 동구 전체)는 60년대의 사정과 또 달랐다. 70년대 이후 동구 계획경제는 사실상 파산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고, 당의 장기 독재는 인민주권의 건강성을 이미 상실한 뒤였다. 체코의 국민소득성장률은 48~78년 연평균 6.1%P였으나 79~82년 1.6%P로 격감했다. 89년 벨벳혁명 당시의 성장률은 0.9%였다.
‘77헌장’이 소수 지식인들에 의해 비밀리에 계획되고 시도됐다는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바출리크의 78년 지하 칼럼 ‘Remarks on Courage 용기에 대하여’의 요지도 그에 대한 자아비판이자, 하벨 등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었을 것이다.
바출리크는 수 차례 연행 취조를 당한 적은 있지만, 불가사의하게도, 제대로 옥살이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을 두고 반체제진영 내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 글에서 바출리크는 “정권에 의해 탄압받은 양에 따라 반체제 영웅의 값어치가 매겨지는 현실”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우리의 싸움은 익명으로도 전개돼야 한다.(…) 드러나지 않고 파괴되지 않은 온전한 힘들이 새로운 폭발로,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ast Central Europe in Exile Volume 2: Transatlantic Identities, 2권)
하벨은 “그가 감옥에 가지 않은 것 때문에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그는 “알려진 영웅들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더 혹독한 탄압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그 익명의 탄압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웅’들이 탄압받은 것도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85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과 거기서 촉발된 동유럽 민주화 운동은 89년 공산주의의 마지막 보루였던 체코로 번졌다. 그해 11월 17일 나치 항거 및 프라하대학 폐쇄 5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린 나로드니 트리다(Narodni Trida)광장에는 학생 1만5,000여 명이 모였고, 후사크 정권 반대시위로 이어졌다. 강제 진압과 부상, 규탄 시위와 노동자 동조 파업…. 12월 후사크는 야케시(M.Kakes)에게 당 제1서기직을 물려주고 퇴장하지만, 체코 진영의 대표적 반체제 조직이던 하벨의 ‘시민포럼’과 슬로바키아 진영의 ‘비폭력 시민운동’ 등은 국민화합정부를 구성, 하벨을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그의 벨벳혁명 정부에는 그와 함께 활동했던 수많은 동지들이 참여했지만, 바출리크의 이름은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바출리크가 누린 것은 금서였던 작품과 작가 활동의 해금이었다. 벨벳혁명 이후 바출리크는 전과 다름없이, 다만 합법 일간지 ‘리도베 노비니’에 매주 정치ㆍ문화 칼럼 등을 쓰면서 여생을 보냈다.
87년 출간한 그의 책 ‘A Cup of Coffee With My Interrogator 심문자와의 커피 한 잔’은 77~87년 지하출판 형식으로 발표한 에세이와 칼럼 23편을 골라 엮은 책이다. “유쾌하면서도 불온하고, 생각 없이 낙천적인 듯하지만 하나같이 사랑스러운”글들이라는 평이 있다. 비밀경찰의 검열을 예상한 듯한 제목에서 엿보이는 냉소적 여유는 승리의 확신 혹은 예감에서 배어 나온 것일지 모른다. 그 기운으로 체코의 겨울과 꽃샘추위를 이긴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바출리크는 1926년 7월 23일 체코 브루모프에서 태어나 지난 6월 6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보후슬라프 소보트카 체코 수상은 “생애 내내 어떤 정권 하에서도 언제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글과 말을 누렸던, 중요하고 용감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라 추모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