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대서양에서 발생하는 열대성저기압 허리케인은 매년 10차례 가량 미국 남부를 찾는 불청객이다. 연례적 자연재해이다 보니 역설적으로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 어느 정도 예측과 대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5년 8월은 달랐다. 카트리나로 명명된 대형 허리케인이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를 강타하고 지나간 폐허에 초강대국 미국의 치부가 드러났다. 2,500명이 숨졌고 1,000억달러가 넘는 재산피해를 남겼다. 카트리나의 위력이 워낙 세기도 했으나 인재(人災)가 겹쳤다. 재난 대비가 없었고, 올바르고 신속한 의사결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재난, 그 이후’는 카트리나가 들춰낸 미국사회의 총체적 부실에 대한 기록이다. 뉴올리언스의 대형 병원 메모리얼 메디컬 센터에서 5일 동안 벌어진 일에 초점을 맞춘다. 의사들과 간호사, 간호실장 등 병원의 주요 인력과 병원 주변인물들의 증언을 토대로 미국의 축소판이랄 수 있는 당시 센터에서 벌어진 일들을 펼쳐낸다.
메모리얼 메디컬 센터는 환자 대피 방법부터 혼선을 빚었다. 병원 전체가 침수돼 비상용 전력마저 끊길 위급 상황에 처하자 병원 상층부는 환자들을 1~3등급으로 나눴다. 비교적 건강해서 스스로 거동할 수 있는 환자가 1등급, 부축이 필요한 환자가 2등급, 매우 위중해서 숨만 붙어있다시피 한 환자가 3등급으로 각각 분류됐다. 1등급 환자가 최우선 이동 대상이었고, 3등급은 마지막에 대피시키도록 병원은 결정했다. 위급한 환자를 먼저 치료하거나 이동시키는, 여느 병원의 보편적인 행동 방식과는 정반대의 의사결정이었다.
살아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먼저 챙긴다는 사고는 합리적이면서도 비합리적이었다. 환자의 상태는 시시각각 변한다. 또 죽을 확률이 더 높은 환자를 방치해도 된다는 결정을 누가 내릴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의문도 발생할 만했다. 카트리나가 지나간 뒤 병원에서는 시신 45구가 발견됐다. 대부분 3등급 환자였다. 사전에 차분한 논의와 숙고를 거쳐 만들어진 지침이 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책은 지적한다. 시스템 붕괴에 따른 결과라는 비판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은 엇갈리고 기억은 흐리다. 대부분 자신들의 입장에서 체험을 유리하게 해석한다. 법적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일부러 거짓도 흘린다. 저자는 이런 오류를 줄이고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6년 동안 500번 가량의 인터뷰를 했다.
미국은 카트리나에 무릎 꿇었으나 재난의 반복을 막을 태세는 돼 있는 듯하다. 이런 꼼꼼한 ‘사후 보고서’가 나와있으니. 세월호 참사를 겪고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과 싸우고 있는 한국사회는 뒤늦은 대책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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