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대통령이 된 코카 재배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된 코카 재배자

입력
2015.07.10 15:05
0 0

볼리비아 토착민 대통령 1호 모랄레스 대선서 '신성한' 코카 합법화 주장

백인 VS 원주민 대결 구도로 승리, 21세기 대표적 좌파 정치 모델로

볼리비아를 방문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9일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씌워준 전통 볼리비아 모자를 쓰고 웃고 있다. 교황이 볼리비아에서 시음한 코카는 모랄레스 대통령에 의해 기성 권력으로부터 대다수 민중을 구분해 결집시키는 ‘빈 기표’로 작용했다. 라파스=AP 연합뉴스
볼리비아를 방문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9일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씌워준 전통 볼리비아 모자를 쓰고 웃고 있다. 교황이 볼리비아에서 시음한 코카는 모랄레스 대통령에 의해 기성 권력으로부터 대다수 민중을 구분해 결집시키는 ‘빈 기표’로 작용했다. 라파스=AP 연합뉴스

중남미 국가를 순방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8일(현지시간) 볼리비아 방문에 앞서 코카잎 차를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볼리비아 원주민들은 1,000년 넘게 코카를 ‘신성한 작물’로 여기고, 식재료와 약품으로 써왔지만 미국이 1980~90년대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며 코카인 원료인 코카의 주요 생산국 볼리비아가 ‘마약의 원산지’라는 오명을 썼다. 교황의 퍼포먼스는 해발 4,000m 고지대에 있는 라파스 공항에서 행여 나타날지도 모를 고산병에 대한 예방 조치 이상의, 하루 800만명의 볼리비아 국민들이 소비하는 성스러운 작물 코카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 셈이다.

볼리비아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에보 모랄레스는 그 스스로 코카 재배자였고, 코카 재배 유통의 합법화를 요구하며 2005년 볼리비아 사상 첫 토착민 대통령이 됐다. “볼리비아 코카 재배자들 속에서” 살면서 에보의 성장을 지켜본 저자는 그를 통해 21세기 좌파 정치 모델을 제시한다.

탐욕의 정치를 끝낸 리더십, 에보 모랄레스 스벤 하르텐 지음ㆍ문선유 옮김 예지 발행ㆍ358쪽ㆍ2만3,000원
탐욕의 정치를 끝낸 리더십, 에보 모랄레스 스벤 하르텐 지음ㆍ문선유 옮김 예지 발행ㆍ358쪽ㆍ2만3,000원

다민족 국가인 볼리비아는 인디오가 55%, 메스티조(백인 인디오 혼혈)가 30%, 백인이 15%를 이룬다. 소수의 백인이 수백 년 동안 부와 권력을 거머쥔 이 나라에서 서민 상당수는 1953년 농지개혁 이후 코차밤바 트로피코로 이주해 코카 농사를 지었다. 이주자를 단속하기 위해 농민조합과 광산노동자조합을 본떠 만든 ‘신디카토’가 생겨났고, 이는 생활공동체로 발전한다. 지방의 모든 선출직은 전직 신디카토 지도자들이 차지하는데 “신디카토는 지도부 자리가 아주 많은 게 특징”이어서 결국 모두가 공평하게 권력을 누린다. 별별 회의가 다 열리고 조합원 모두 공평하게 발언 기회를 가지며 끝장 토론을 거쳐 다수결 아닌 합의로 결정하는 것도 이 조합의 특징이다.

에보는 1985년 신디카토 지도자로 선출됐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끝장 토론의 미덕을 이어갔다. 요컨대 “민초의 이미지”에서 시작한 에보의 정치 행보는 “의사결정 합의의 형태”라는 진정성 담긴 정치공학을 통해 여타 좌파 포퓰리즘과 결을 달리하며 승승장구한다. 기성 정치권에 대항해 만든 사회주의운동당(MAS) 역시 지도자를 회원들의 매개자 혹은 조력자로 간주하는데, 저자는 이를 “프롤레타리아의 평등을 강조하고 조직 내 위계 서열을 거부”한 로자 룩셈부르크 정치 모델의 실현체로 평가했다.

2005년 대선에서 에보의 코카 재배 합법화 주장은 ‘백인-친미-기득권층 대 원주민-반미-서민층’ 대결의 상징이 됐다. 저자는 이를 공동체 내부의 정치적 차이를 흐리게 하면서 외부 타자와의 경계를 설정하는 안토니오 그람시 식 ‘헤게모니 전술’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발상은 정치에 무관심한 범죄자라는 코카 재배자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정치사회에서 부당하게 배제된, 즉 억압된 현실의 희생자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대단히 중요했다. 코카가 볼리비아의 상징이 되면서 코카 재배자들은 천연자원뿐만 아니라 국권의 수호자가 되었던 것이다.” 코카의 상징적 가치는 국명을 볼리비아공화국에서 볼리비아 다민족 국가로 바꾸는 등 광범위한 개혁을 포함한 신헌법(2009) 제정으로 이어진다.

에보의 정치실험은 성공할 것인가. 저자는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대중동원에서 지지를 얻는 것을 선택해 보수파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민초 사회운동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 광범위한 정치적 비전을 희색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현실적인 목표로 전환해야 한다”는 조언을 남긴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