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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 김] 우유 못 먹어도, 나는 요리사

입력
2015.07.0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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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요리사다. 그것도 서양요리사다. 크림을 쓰고 치즈를 갈고 우유를 끓이고 버터를 녹인다. 그런데 난 아이러니하게도 우유를 소화하지 못한다. 난 유당분해효소결핍증(Lactose Intolerance)를 앓고 있어서 일반적인 유제품을 먹으면 설사, 복통, 구토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난 키가 181cm에 몸무게는 90kg을 넘는다. 말인즉슨, 모유나 우유를 먹는 유아기 때는 내가 가진 증상이 크게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가진 요리사로서의 문제가 그 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사과나 복숭아 같은 과일 알러지도 있고, 게나 새우 등의 갑각류를 오래 만지면 가려워져서 요리할 땐 꼭 장갑을 껴야 한다. 매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속이 쓰려 참으면서 먹기도 하고 초콜릿이라도 꼭 먹어야 한다. 연어 기름 냄새와 고등어 비린내도 싫어해 집 밥상엔 올리지 않는다. 이쯤 되면 고기 못 먹는 사자나 당근 못 먹는 토끼나 다름 없다.

나는 요리사다. 서양 요리사다. 그런데 우유도 못 마신다는 치명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요리사다. 서양 요리사다. 그런데 우유도 못 마신다는 치명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유당 때문에 토할 것 같아도 참고, 과일 때문에 입안이 간지러우면 알러지 약을 먹어가면서 2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요리를 하다 보니 레시피를 만들고 간을 보는 것에는 영향이 없다. 내 가게 메뉴 중엔 사과를 넣은 크림에 돼지고기를 끓인 북유럽식 스튜가 있고, 가게에서 사용하는 버터와 치즈는 국내 어느 레스토랑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양질의 것이라 자부한다. 또 가장 잘 요리할 수 있는 어패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연어와 새우, 게, 랍스터를 꼽는다.

요리사로서 핸디캡을 고백하는 이유는, 요리사 지망생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종종 받기 때문이다. 어떤 질문인고 하니, 자신은 요리를 정말 사랑하고 잘 하고 싶고 자신도 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시고 집안 상황이 여의치 않고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아 신념을 지키기가 쉽지 않으니 힘이 될만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설암으로 미각을 잃고도 미국 최고의 요리사로 군림한 그랜트 에커츠와 그가 만든 환상적인 요리들.
설암으로 미각을 잃고도 미국 최고의 요리사로 군림한 그랜트 에커츠와 그가 만든 환상적인 요리들.

주변 상황이 아무리 녹록지 않아도, 요리사가 진짜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묵언수행 하듯이 꾸준히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나처럼 유제품을 먹으면 탈이 나고 과일과 갑각류 알러지가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테니, 포기하지 않고 10년만 노력하면 어디 가서 자신 있게 ‘나 요리 잘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랜트 애커츠라는 미국의 젊은 요리사는 설암 4기 판정을 받은 후 미각을 잃고도 ‘요리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제임스비어드 재단상’을 받았다.

꼭 요리사가 아니더라도 매사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모님의 반대, 경제적 어려움, 주위의 시선에 휘둘리지 말고 꿋꿋이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적어도 여러분은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 요리인데 유제품을 못 먹어서 주변사람들이 걱정하듯 “괜찮아요?”라고 물으면, 그 때마다 웃으면서 “베토벤은 귀가 안 들렸다는데요?”라고 응답할 필요는 없을테니 말이다.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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