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이 캠퍼스에서 독립 영화 상영을 추진했다. 그런데 그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막겠다고 페퍼포그 차를 앞세운 전경 부대가 캠퍼스를 까맣게 밀고 올라왔다. 중앙도서관을 지나 대강당으로 이어지는 오르막 길엔, 강의실에선 자주 볼 수 없었던 동기 하나가 쇠파이프를 들고 장수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 역시 갓 스무 살이었다.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모순은 우리의 망막과 기관지, 피부와 고막을 파고드는 지랄탄과 꽃병만큼 구체적이었다. 사회 현상이란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고 강의했던 한 심리학과 교수는, 학원과 노동 현장에 뿌려진 피와 꺾어진 뼈를 보고서도 사실의 상대성을 운운할 수 있냐는 또 다른 스무 살 동기의 서늘한 질문 앞에 할 말을 잃었다. 서둘러 마쳐진 수업처럼 현실은 불안하고 직설적이었다.
며칠 전 새정치민주연합이 당 홍보위원장으로 광고계의 유명인사를 영입했다. 알려진 바로는 지난 대선과 총선을 겪으면서 여당의 홍보본부장이 보여준 소위 ‘프레임’의 위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빨간색과 반바지, 하버드 출신 청년 비대위원의 혁신위원장 진출 등이 그가 만든 ‘프레임’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노골적인 갈등은 프레임이 현실과 무관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공론장은 프레임을 만들고, 다른 프레임과 경쟁하고, 결국 자기 프레임을 일반화하는 게임에 빠져있다. 메르스와 그리스를 둘러싼 프레임들 사이의 속도전은 사건의 첫 번째 기사와 함께 시작됐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프레임 경쟁에 매몰된 나머지 정작 프레임을 판정할 능력을 잃어간다는데 있다. 한때 프레임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허위 의식’이라고 불렸다. 이 허위 의식은 엄혹한 현실을 경험하게 되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려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갈등하는 프레임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히려 현실이 흐릿해져 가고 있다.
프레임이 이렇게 힘을 발휘하는 것은 프레임 자체의 효용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특정 프레임을 만들거나 지지하는 것은 이를 통해 주변의 사회적 집단 안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인, 언론사들이 소셜미디어에 진지를 구축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엮어진 집단의 에너지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위터 팔로워와 페이스북 친구가 많을수록 팬덤의 지향성 안에 갇히게 되는 고민이 있다. 정치와 언론이 다수의 군집들로 찢어진 공공장의 일인으로만 기능할 때 생기는 위험 때문이다. 이는 공공장과 국가 전체의 운명을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위험이다.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현실들이 전체의 현실과 괴리되면, 결국 전체의 실패를 가져온다. 이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길은 ‘사실’을 찾아내고 공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이범의 허핑턴포스트 칼럼이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오늘날 우리 사회 젊은 세대의 보수성을 북한에서 찾고 있다. 그가 사회조사 데이터에서 읽어낸 젊은 층의 북한에 대한 자세는 늙은 좌파의 관습적 북한 프레임에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한국일반사회조사 데이터 10년치를 분석해 보면 좀 더 흥미로운 그림이 나온다. 20, 30대가 북한에 대한 태도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때가 2008년이었다. 2010년 부정적 태도의 정점을 찍다가 2013년 40~60대와 차이가 없거나 역전하고 만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젊은 층의 일반적 정치 성향이 전혀 다른 궤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기간 20, 30대는 항상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진보적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젊은 세대가 전체적으로 보수화되었다고 말하는 건 정확하지 않다. 데이터는 젊은 세대의 정치 성향과 북한에 대한 자세 사이에 분리(decoupling)가 생겼다는 점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 진보 프레임에 대대적인 개혁이 시작되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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