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전인 1967년 6월 한국은 제7대 국회의원 선거 후유증으로 뜨거웠다. 그 6.8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의원 정수(175명)의 73.7%인 129명(전국구 27명)을 당선시킨다. 신민당과 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잇달았고, 정부는 전국 30개 대학과 148개 교교에 임시 휴교령과 조기방학을 지시했다.
하지만 야당도 학생도, 뱃지를 단 국회의원 대다수도 그 선거가 한 달 전 치러진 대선에서 신승한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 포석의 하나라는 사실, 다시 말해 69년 3선 개헌과 72년 유신 선포로 이어질 한국 현대사의 길고 어두운 터널의 들머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가 ‘동백림(東伯林) 사건’으로 불리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 게 저 ‘혼란기’, 날짜로는 총선 한 달 뒤인 67년 오늘(7월 8일ㆍ사진 9일자 한국일보 1면)이었다. 국내 대학가와 독일 프랑스 등 해외 유학생 교민까지 무려 194명이 동베를린(동백림)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 교육을 받고 대남 적화활동을 했다는 거였다. 재독 작곡가 윤이상, 재불 화가 이응로, 당시 서울대 사범대 전임강사였던 번역가 천병희 등 교수 예술인 의사 공무원 107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입건됐고, 31명이 구속 기소됐다. 68년 3월 대법원은 당시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공부하던 정규명(당시 39)과 정하룡(당시 34ㆍ경희대 조교수)의 사형을, 나머지에 대한 무기~징역 3년 6개월 형을 확정한다. 하지만 정부는 2년 뒤인 1970년 그들 전원을 성탄절 특사로 석방한다.
독재정권이 동백림 사건 희생자들에게 특별히 ‘관대’했던 것은 국제 사회가 수사 및 재판 과정을 흘겨보고 있어서였다. 정권은 서독과 프랑스 미국 오스트리아 등서 용의자 30여 명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해당국 주권과 국제법을 어긴 터였고, 재판 참관 등을 통해 그들의 혐의와 법 적용의 터무니없음이 국제사회에 적나라하게 알려진 뒤였다. 국제적십자사를 비롯한 세계 인권단체의 항의와 당사국들의 외교적 압력도 이어졌다. 그 전인 64년의 인혁당 (1차)사건, 그 후인 74년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2차) 사건, 79년 남민전 사건 피해자들에게는, 여러 다른 여건들과 더불어, 동백림 사건 때처럼 제 일인 양 감시하고 챙겨준 우방이 없었다.
2006년 1월 26일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을 중앙정보부가 6.8 선거 부정에 대한 반대를 무력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과대 포장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정부가 관련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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